운악산 형등사 현판을 바라보다
묘한 즐거움을 얻는다.
사석원화백이나 지금은 고인이된 김점선 화백의 그림처럼 한글 현판의 글씨가 유쾌하다.
진리의 불을 밝히는 현등.
그 익살스런 편액만큼 님들의 마음에도 즐거움이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운악산은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과 가평군 하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936m의 산이다.
화악, 관악, 감악, 송악과 함께 경기 오악으로 불리운다.
눈썹바위 아래에서
서둘러 개장한 음식점처럼
가을이 어수선하다.
뜸이 덜든 밥처럼 가을이 혀끝에서 겉도는 느낌이다.
가을을 찾아 북으로 왔건만 물기없는 단풍잎만
두서없는 글처럼 우리를 반긴다.
스스로를 秋男이라 밝히고 가을 앞에 기꺼이 몸을 내미신 나한님.
미소가 생불의 미소 그대로다.
나
나를 나라 부르는것조차 이상하다.
나 속의 나와, 나 밖의 나는 다른 모양이다.
좋은 가을 볕아래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내가 낯설다.
의식의 저 먼 가장자리를 차고 기억이 회유해 오듯
수려한 바위를 타고 가을이 산을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집중 탐구라도 하듯 병풍바위에 시선을 꽂고
모두들 산을 보고 또 바라본다.
가을의 시작인것 같기도 하고 아름다움의 끝같기도 한 느낌이다.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감성의 긴장.
온화한 가을날의 슬픔이 바위 마다에 깃들어 있다.
좋은 풍경을 대할 때는 탄식처럼 나도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올 때가 있다.
운악산 병풍 바위 앞에서는
잠시의 망설임 뒤에 감탄이 터져나왔다.
마치 비목을 연주할 때의 엇박자 처럼
1-2초의 시차가 생기는것,
이것이 내가 운학산을 첫 대면했을 때의 느낌이다.
잘 생긴, 그러나 아주 잘 생기지는 않은 내 총각 시절의 데이트 상대.
뭐 그런 느낌이다.
미륵 바위
미륵 바위를 왜 미륵이라고 부르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들 그리부른다.
내 이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든 바위에는 그 이름을 붙였 때의 이름붙인 근거가 분명 남아 있을것이다.
미륵불을 닮아서인가
미륵을 기다리는 간절함의 메타포인가.
정교하게 맞춰진 퍼즐처럼 바위들이 서로에 의존한 채
봉우리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이
분명 미륵을 연상시켰을것이다.
긴 기다림의 상징처럼 느껴졌을것이다.
오메 단풍들것네.
단풍이 곱게 물든 얼굴이다.
물든다는것은 젖는다는것이다.
문득 가을 한 조각이 날아들어 마음과 얼굴을 곱게 물들인다
쪽빛에 물드는 몸과 마음.
가을은 즐거움이자 도취이다.
가을 그늘
빛은 종교적 경건으로 다가왔다가
예배를 끝낸 사람처럼 흩어진다.
길 위에는 기도 뒤의 즐거움이 묻어있다.
산에 오르기를 잘했다.
가을은 이렇게 가을만으로 즐겁지 않은가.
환한 웃음 뒤에
여과없는 가을빛이 가득하다.
오늘만은 시간에 늦어서는 안된다는 내 스스로의 채근에 밀려
산을 오른다.
벌써 산 건너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산은 의외로 의연했다.
푸른 하늘 아래 그대로 드러낸 몸뚱아리 위로
일찌기 보지 못한 섬세한 빛이 흘러다녔다.
가을이 아직 완연한것도 아닌데
단풍의 붉은 빛은 화선지에 물감이 번지듯
부드럽게 번져 나간다.
마치 내가 처음 본 가을처럼,꼭 그 가을처럼
풋 가을을 안는 느낌이다.
산을 넘자 깊은 가을을 만난다.
산을 올라야할 가을이 계단 저 아래 옹색하게 묻혀있다.
가을이 다만 한 덩어리를 이룬 붉은 기운으로 느껴졌다.
계단을 타고 하산한다는것이 마치 이르지 않으면 안될 어딘가를 찾아나서는 기분이다
어떡하던 오늘의 대미를 가을로,지극히 가을적인것으로 마감하고 싶다.
모든 정경과 감촉이 얇은 막을 걷어낸것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나는 마치 세상을 이미 훤히 알고 있다는 눈으로 가을을 바라 보았다.
가을도 아름다움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잉여의 빛을 발했다.
감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빛이었다.
지울 수 없는 단호함이 차고 넘쳤다
나는 비로소 가을을 인정했다.
무언가 가을이 가기전에 서둘러야만 할것 같았다.
가을이 수놓은 온갖 산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시간은 직선을 이루며 흐르는가 싶다가도
문득 숲에 이르러 굽이치며 소용돌이 친다.
물기를 머금은 잎새에 짙은 붉은색이 내려 앉았다.
보이지 않은 존재가 마침내 가시적인 빛으로 드러나는것이다.
나는 되도록 긴 시간을 가을과 함께 머물렀다.
오늘은 시간도 더디게 흐른다.
시간이 멈춘듯한 적요함이 계곡 가득 자리 잡았다.
이 때 쿵하고 먼 바다 울음 소리같은 굵고 낮은 소리가 가을 관목 숲을 누르며 들려왔다.
포 소리였다.
포 소리에 깨어 나는 가던 길을 내려갔다.
더딘 가을을 또 만났다.
물이 말라버린 무지개 폭포가
비바람에 닳은 백골처럼 성긴 단풍 속에 걸려있다.
고통과 희망이 교차하듯, 우기와 건기가 번갈아 돌아오듯
비는 폭포를 만들었다 거두기를 반복한다.
물이 마른 폭포면 어떠랴
지금은 가을이다.
뜻하지 않는 목마름이 어디선가 엄습해왔다.
젊음과 격렬한 희망이 사라진것처럼
물이 마른 홍폭의 풍경은 그렇게 무미했다.
- 후 기-
수많은 인간들이 제 나름의 삶을 만들어 내듯
세월은 시간에 제 나름의 옷을 입힌다.
그리고 세월은 또 강이 되어 흐른다.
산을 오른다.
맑고 기분 좋은 산.
탁한 괴로음을 주는 산.
이런 산에 대한 경험과 감성들이 합쳐져
도도한 물줄기가 된다.
이 땅에 수많은 산이 있다는것은 큰 축복이다.
나는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운악산에 올랐다.
신명이 마음을 가볍게 하였는지
나는 가을의 영문도 잊은채
봉밀을 실은 벌처럼 산을 넘어왔다.
Golden Dream, Shardad Ro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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