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시 30분
2009.07.25.16시 28분
영남 알프스 서쪽을 능선을 이루는 운문지맥.
가지산을 중심으로 능동산-운문산-억산 -구만산-육화산으로 이어지는
장대하고 멋진 산맥.
운문지맥 종주에 앞서.
구만산 정상 못지않게 허전한 능동산 표지석.
17시 32분
안개 낀 저녁 숲길을 걷는다.
헤르만 햇세 식의 수사도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하고 나오는 그 매혹적 주제가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Play misty for me'의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도 아니다.
아니 그랬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담담하게 마치 운명처럼 다가오는
이 기분좋은
침잠.
저녁 안개의 선물이다.
18시 45분
가지산 진입 분기점 도착.
붉은 깃발
안개 속의 붉은 깃발이
사뭇 도발적으로 느껴진다.
19시 28분
음산한 밤안개 속을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중앙동 49계단 지나면
"물고기가 사는 곳에 사람이 산다"는
재미있는 북카페가 있는데
나는 나무가 살고 있는 심산을 향해
끝없이 긴 제이콥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산 주인이 깰까싶어
조심 조심 오르는데
촐랑거리는 휘파람새가
휘리릭 호이 호이 목청껏 울음을 울어 기어이 아는 채를 한다.
20시 10분
가지산 중봉.
짙은 안개를 머금고 있다.
희미한 렌턴빛에 의존해
미끌거리는 산길을 걷는다는것이
과연 나에게 허락된 일인지.
꼭 야밤을 택해 험한 산을
올라야한다는것이
내게 합당한 일인지.
산을 오르는 내내
마음 한켠에 쪼그리고 있는
나의 엉뚱하게 커진 만용에게
던지는 질타성 질문이다.
나는 대답을 대신해
잔말말고 올라라는
싱거운 자기확신만을 들었을 뿐이고...
20시 52분
밤 아홉시의 가지산 정상은
두터운 어둠으로 덮혀있었다.
빛을 잃은 검은 안개가
사포처럼 거칠게 피부에 닿는다.
안개를 턴다.
먼 동녁의 희미한 불빛들이
톡톡 터지며
깨볶는 소리를 낸다.
21시 45분
늦은 밤의 화려한 밥상.
산상에서의 정찬은 늘 분에 넘친다.
잘 넘어가지도 않건만
한잔 술이 말라버린
목구멍을 틔워준다.
술 한잔에 벌써 졸음이 온다.
내일 가야할 먼 길이
상상 속에서
휘청댄다.
09.07.26
새벽 5시
새 소리에 눈을 깬다.
새벽의 새소리는 늘 극성스럽다.
제 소리를 더 높이려
새는 더 목청을 올리나보다.
생각보다 새로 산 침낭이 따듯했다.
새벽녁에 들었던 음악이 떠오른다.
어제의 짧은 단잠은 골드베르그 변주곡 때문이다.
새로 한시 반경
산을 오른 한떼의 산행팀 때문에
그나마 토끼잠도 설쳐버렸다.
이른 새벽의 가지산은
미처 안개를 벗지 못한 채 졸고 있다.
그 물기를 모아 꽃들은 부지런히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상에서 제일 고운 자태로
보라고 하지 않아도
돌아보지 않을수 없는 고운 색깔로
꽃은 그렇게 자신을 들추어 낸다.
원추리
바위 채송화
가지산 정상의 구조물.
연초에 펄럭이던 찢어진 태극기는 사라지고
국기 게양대만 빈산을 지킨다.
자연 앞에 사상이 굴복한 느낌이든다.
통일의 꿈을 가진 애초의 사람이 다 궁금하다.
세상이 변했다.
6시 18분
안개가 흩어진다.
산들의 날이 온다.
다리에 힘을 올리고
가슴을 벌려
공기를 들이켜라.
하늘의 산을 향해
신념에 찬 기도를 올려라.
나를 더 오래 산 속에 머물게 해 주십시요.
기다리지 마라
비가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가라.
긴 부리로 비바람 이겨낸 새처럼
그렇게 그렇게 이겨내라.
6시31분
산에 올라서는 도시인처럼
도시에서는 산사람처럼 나는 행세한다.
어디에서도 어중간하다
말이 좋아 정서적 유목민이지
이것도 일종의 방황이다.
고민과 갈등의 몸으로
낭만을 좇아가는
현대 유목민.
구름문 앞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문 안에는 아무도 없어서지
대답대신 정적만 가득합니다.
문 없는 문을 향해
내 마음 한조각을 밀어넣습니다.
바람이 얼핏 인기척을 합니다.
산은 이내 고요해집니다.
주인 없는 집이 겁이나서 인지
나는 또 문을 두드립니다.
지난날 호박소 지나 백운산을 오르며
가지산,운문산을 바라보았는데
이제 가지산 위에서 옛 추억을 되살린다.
어디가나 깊고 풍성한 계곡이다.
칠월의 산들은
恨처럼 희디힌
깊은 물길을 품고있다.
떠나고 흘려보내
늘 서글퍼다.
맑은 수족관에서 사는 진귀한 물고기처럼
산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흰 구름이 고민처럼
산마루에 걸려있다.
속히 걷는것 만이 산행의 즐거움은 아니다.
빨리 도망치는 세상의 모든것들을 붙들어 세우고 싶다.
진정한 산행의 묘미는 산 속에 더 오래 머무는것이다.
산들의 파도를 더 멀리 보내기위해서는
더 사나운 바람,
더 따가운 햇살이 필요하겠지요.
나는 다만 어두워져가는 눈으로
사라지는 산들을 봅니다.
아니 어쩌면 사라지는것이 아니라
멀리서부터 되돌아 오는 산일지도 모릅니다.
가슴에 가까와 질수록
더 벅찬것이기에
나는 되돌아 오는 산이기를 희망합니다.
구름이 산을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 힘이다.
그냥 진종일 여기 앉아
저들의 대결을 지켜보는것만으로도
나는 하루를 지낼성 싶다.
밀어내는 아침과 머물고 싶은 거대한 저녁의 힘이
묘하게 맞물려 대치 중이다.
7시 7분
꽃들이 무리지게 피는것은
제 뿌리 속 상처가 서로 닮은 탓이리라.
운문을 열고 들어선 제산들이
서로 닮아가는것은
긁히고 깍힌 그들의 고통이 서로 같았기 때문이리라.
저 둥글게 걸린 적멸의 세계여
한 생애를 다하여 다가가야할 사랑이여
나 또한 그대와 같은 한 뿌리의 돌이요, 꽃이니
세월의 내력에 숨길것이 무어란 말인가.
구름의 문앞에서 기별을 기다리다
부끄럼 없이 가던 길을 가게된다.
운문산과 그 지맥 위의 여러 산.
까치 수염
백운산(앞)과 재약산(뒤)
내가 막 산행에 재미를 붙였을즈음
백운산 지나 쇠점골로 갔다가
어느 싱그운 벗 하나가
내친김에 가지산까지 가보자라는 말에
손사래를 쳤던일이 엊그제 같은데
여기서 반대로 그 편을 바라보니
백운산이 바로 코앞이다.
세월이 흐른 만큼
산만 무심한 채 가까와 졌나 보다.
남명리 더 넓은 사과밭.
초겨울의 그 싱그러운 얼음골 사과를 키워내고 있다.
동자꽃
08시 7분
아랫재에서 운문산 정상을 향한 한시간 20분의 급경사.
전열을 가다듬고
힘 한번 쓸 준비를 한다.
둥글고 밋밋한 운문산 정상.
석골사에서 시작해 상운암을 거쳐 오르는 코스보다는 아기자기한 맛이 영 덜하다.
아니 아예없다.
지천에 널린 야생화를 감상해가며
한여름 단기 특강을 받는 기분으로 산을 애써 오른다.
고도계의 상승감이 기분좋다.
땀이 벌써 비오듯 쏟아진다.
운문산을 향하며
둥근 이질풀
11.15분
운문산 정상 앞에는 그 이름에 걸맞는 문패가 놓여있다.
고도를 고쳐 새길 때 저 석공의 낭패감은 어떠했을까.
서체가 차분하니 마음에 든다.
13시
팔풍재-억산을 향하며
범봉에서.
깨진 바위
13시 50분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바위이다.
위에서 낙석이 떨어질까 봐 두정부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들어간다.
물기를 한껏 두른 바위가
연신 혀를 내밀며
사람을 밀어낸다.
다들 그래도 용케 위험구간을 잘 벗어난다.
산행에 있어 최고의 위험 대상은 오히려 방심이 아닐까.
망태 버섯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망태 버섯
저 그물망으로 뭘 포획하려는 건지
비가 많이 와서인지 온 산에 진귀한 버섯이 지천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영락없이 술먹고 졸린 표정이다
억산 마지막 구간이 힘들긴 힘들었나보다.
억산 앞 깨진 바위가
그림자처럼 보인다.
내면의 모습일까.
14시 20분
이름 모를 버슷
목이버섯
무수한 숲을 지나가며
오로지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이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모르겠으나
색을 빼앗자
숲은 문득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sound of silence.
안개가 G현 의 소리보다 더 낮은 소리로 다가온다.
이런 소리는 몸으로나 맞이해야 하는걸까
나는 영역을 알지 못하는 경계를 애써 부수어
음을 느껴 본다.
안개가 피부에 부딪힌다.
물기가 몸속 깊숙히 파고 든다.
피가 술렁인다.
소리가 인다.
정교한 침묵의 소리.
안개에 이는 나무들의 물결
그 물결 속으로 내가 나아간다.
소리의 우무질.
무채의 빛과 침묵의 소리
비 존재의 존재.
16시 30분
가인 계곡
구만산과 북암산 사이의 길고 아름다운 계곡.
지리산 중산리 계곡을 떠올릴 만큼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했다.
지친 발아래를 위로하듯
길은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했다.
진통제를 세번 먹고서야
이번 종주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나를 땅에다 잡아 맨것은 무엇이고
나를 나아가게 한것이 무엇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내 두 다리의 고통은 심장을 통해 순화 되고
머리를 통해 환상으로 바뀌어 갔다.
진통제는 이런 순환 경로 속에서
촉매제로 작용한 것일까?
나는 걸을 수 없을 만큼 아픈 순간에도
다시 걸을 수 있을것이란걸 예감했고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었다.
나는 용케 걷고 또 잘 걸었다.
이것은 이미 짧지 않은 수련을 통해
통달한 하나의 습관이다.
운문 지맥에서의 일박 이일.
앞으로 또 어떤 다이나믹한 코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언제나 제일 오르고 싶은 산은
다음에 오를 산인것만은 분명하다.
상상은 늘 즐거움을 준다.
17시 51분
봉의 저수지 다 와서야
내 몸에 비로소 물 냄새, 나무 냄새가 묻혀 있음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일박 이일 동안 밟고 지나 온 여러 산들의
흙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냄새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지나온 산들을 죽 둘러 본다.
물은 여전히 잘 흐르고
산은 짙푸르기만 하다.
산은 이내 내 모습 보고
잠시 시간을 멈추어
나를 배웅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것은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다.
세상이 모두 다 제대로이니 보기에도 좋았다.
-에필로그-
휴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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