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오르는 산/산행

구름문을 두드리고...

poll™ 2009. 7. 28. 17:57

 

 

 

2009.07.25.16시 28분

 

<배내봉-능동산-가지산-아랫재-운문산-딱밭재-범봉-팔풍재-억산-구만산-봉의 저수지>

 

나같은 아둔패기에게 걸어야할 총 거리를 계량한다는것은 아무른 의미가 없다.

어떤 이는 빨리 걸어 산을 넘지만

나는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산을 찾는다.

일박 이일.

집을 떠나왔으니 자유다.

자유의 냄새가 좋다.

세상이 그다지 나를 속박한것도 아니었건만...

 

 

17시 32분

 

구만산 정상 못지않게 허전한 능동산 표지석.

 

 

 

안개 낀 저녁 숲길을 걷는다.

헷세의 싯구가 떠올라

나 혼자인것이 이상해졌다.


"내 생활이 아직 밝던 무렵 세계는 내 친구들로 가득했었으나"
"지금 안개 내리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공간

이 아늑한 나만의 asylum.

나는 무소의 뿔처럼 고립을 기꺼워한다.

담담하게, 마치 운명처럼 다가오는

이 기분좋은

침잠.

저녁 안개의 선물이다.

 

 

 

 

18시 45분

 

가지산 진입 분기점 도착.

 

 붉은 깃발

안개 속의 붉은 깃발이

사뭇 도발적으로 느껴진다.

 

 

 

19시 28분

 

 음산한 밤안개 속을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야곱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나의 천국, 나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가.

 

어두움에 희미해진

계단 끝을 바라보다

피식 웃는다.

천국이 너무 가깝다.

 

나무가 주인인 산을

조심 조심 오르는데

집를 나온 휘파람새가

 호~ 호이 목청껏 소리를 내어 기어이 아는 채를 한다.

 

 

 

 20시 10분

 

가지산 중봉.

짙은 안개를 머금고 있다.

 

희미한 렌턴빛에  의존해

미끌거리는 산길을 걷는다는것이

과연 나에게 허락된 일인지.

 

 야밤을 택해 험한 산을

올라야한다는것이

내게 합당한 일인지.

 

산을 오르는 내내

마음 한켠에 쪼그리고 있는

나의 엉뚱하게 커져버린 만용에게

묻는다.

 이번이 마지막일까?

 

 

 

 20시 52분

 

밤 아홉시의 가지산 정상은

두터운 어둠으로 덮혀있었다.

 

빛을 잃은 검은 안개가

얼음 알갱이처럼 거칠게 피부에 닿는다.

 

안개를 턴다.

먼 동녁의 희미한 불빛들이

톡톡 터지며

깨볶는 소리를 낸다.

 

 

 

 

 21시 45분

 

늦은 밤의 화려한 밥상.

산상에서의 정찬은 늘 분에 넘친다.

잘 넘어가지도 않건만

한잔 술이 말라버린

목구멍을 틔워준다.

 

술 한잔에 벌써 졸음이 밀려온다.

내일 가야할 먼 길이

상상 속에서

휘청댄다.

 

 

 09.07.26  새벽 5시

 

새 소리에 눈을 깬다.

새벽의 새소리는 늘 극성스럽다.

제 소리를 더 높이려

목청껏 지저귀나보다.

 

생각보다 새로 산 침낭이 따듯했다.

새벽녘에 들었던 음악이 떠오른다.

짧은 단잠은 골드베르그 변주곡 덕분이다.

 

새로 한시 반경

산을 오른 한떼의 산행팀 때문에

그나마 토끼잠도 설쳐버렸다.

 

 

 

 

이른 새벽의 가지산은

미처 안개를 벗지 못한 채 졸고 있다.

 

그 물기를 모아 꽃들은 부지런히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상에서 제일 고운 자태로

보라고 하지 않아도

돌아보지 않을수 없는 고운 색깔로

꽃은 그렇게 자신을 들추어 낸다.

 

 

 

 

6시 18분

 

산은 산을 바라보는 이에게

하나의 소재이자 형식이된다.

 

세상의 모든 산은 개개의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산이란 소재에 천착하여

산을 마음으로 견인하는것은

산을 오르는자의 의무이다.

 

산을 바라보고 파고드는것이

오늘은 어떤 해석의 여지를 펼쳐놓을지

이른 아침 처음 만나는 산들이 다 경건하다.

 

 

 

 기다리지 마라

비가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가라.

긴 부리로 비바람 이겨낸 새처럼

그렇게 그렇게 이겨내라.

 

 

 

 6시31분

 

산에 올라서는 도시인처럼

도시에서는 산사람처럼 나는 행세한다.

 

어디에서도 어중간하다.

말이 좋아 정서적 유목민이지

이것도 일종의 방황이다.

고민과 갈등의 몸으로

낭만을 좇아가는

현대 유목민.

 

 

구름문 앞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문 안에는 아무도 없어서인지

대답대신 고요만 가득합니다.

 

문 없는 문을 향해

내 마음 한조각 가만히 밀어넣습니다.

 

바람이 얼핏 인기척을 합니다.

산은 이내 고요해집니다.

 

주인 없는 집이 겁이나

나는 또 구름문을 두드립니다.

 

 

 

용수골

 

지난날  호박소 지나 백운산을 오르며

가지산,운문산을 바라보았는데

이제 가지산 위에서 옛 추억을 되살린다.

어디가나 깊고 풍성한 계곡이다.

 

칠월의 산들은

恨처럼 희디힌

깊은 물길을 품고있다.

떠나고 흘려보내

늘 서글퍼다.

 

 

 

맑은 수족관에서 사는 진귀한 물고기처럼

산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흰 구름이 고민처럼

산마루에 걸려있다.

 

속히 걷는것 만이 산행의 즐거움은 아니다.

빨리 도망치는 세상의 모든것들을 붙들어 세우고 싶다.

진정한 산행의 묘미는 산 속에 더 오래 머무는것이다.

 

 

 

 7시 7분

운문산쪽 조망

 

꽃들이 무리지게 피는것은

제 뿌리 속 상처가 서로 닮은 탓이리라.

 

운문을 열고 들어선 제산들이

서로 닮아가는것은

긁히고 깍힌 그들의 고통이 서로 같았기 때문이리라.

 

저 둥글게 걸린 적멸의 세계여

한 생애를 다하여 다가가야할 사랑이여

나 또한 그대와 같은 한 뿌리의 돌이요, 꽃이니

세월의 내력 앞에 숨길것이 무어란 말인가.

 

구름 문앞에서 기별을 기다리다

부끄럼 없이 가던 길을 가게된다.

 

 

운문산과 그 지맥 위의 여러 산

 

 

 

 

 

남명리 더 넓은 사과밭.

초겨울의 그 싱그러운 얼음골 사과를 키워내고 있다.

 

 

 

 

백운산(앞)과 재약산(뒤)

 

내가 막 산행에 재미를 붙였을즈음

백운산 지나 물많다고 소문난 용수골 들렀다가

어느 싱그운 벗 하나

내친김에 가지산까지 가보자라는 말에

 

손사래를 쳤던일이 엊그제 같은데

여기서 그 편을 바라보니

백운산이 바로 코앞이다.

세월이 흐른 만큼

산만 무심한 채 가까와 졌나 보다.

 

 

 

계란껍질을 막 깨고 나온 계란 버섯 

 

 

 08시 7분

 

 아랫재에서 운문산 정상을 향한 한시간 10분의 급경사.

전열을 가다듬고

힘 한번 쓸 준비를 한다.

 

 

 

 둥글고 밋밋한 운문산 정상.

석골사에서 시작해 상운암을 거쳐 오르는 코스보다는 아기자기한 맛이 영 덜하다.

아니 아예없다.

지천에 널린 야생화를 감상해가며

한여름 단기 특강을 받는 기분으로 산을 애써 오른다.

고도계의 상승감이 기분좋다.

땀이 벌써 비오듯 쏟아진다.

 

 

 

 망태 버섯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망태 버섯.

대체 저 그물망으로 무엇을 포획하려는 건지

 잦은 비 탓으로 산에는 진귀한 버섯이 지천이다.

 

 

 

13시

범봉-팔풍재-깨진바위

 

13시 50분

 깨진 바위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바위이다.

위에서 낙석이 떨어질까 봐 두정부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들어간다.

물기를 한껏 두른 바위가

연신 혀를 내밀며

사람을 밀어낸다.

다들 그래도 용케 위험구간을 잘 벗어난다.

산행에 있어 최고의 위험은 오히려 방심이 아닐까.

 

 

 

 

 억산 뒤로 깨진 바위가 그림자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내면의 모습일까.

 

 

 

목이 버섯

 

 

 

 

 

 

 무수한 숲을 지나가며

오로지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이 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모르겠으나

색을 빼앗자

숲은 문득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sound of silence.

안개가 G현 의 소리보다 더 낮은 소리로 다가온다.

이런 소리는 청감으로 맞이할 소리가 아니다.

나는 영역을 알지 못하는 경계를 애써 부수어

 소리를 느껴 본다.

 

안개가 피부에 부딪힌다.

물기가 몸속 깊숙히 파고 든다.

피가 술렁인다.

소리가 인다.

정교한 침묵의 소리가 공명된다.

 

 

 구만산 쪽에서 본 운 문지맥의 산들.

 

 

 

 

 

16시 30분

 

가인 계곡

 

 구만산과 북암산 사이의 길고 아름다운 계곡.

지리산 중산리 계곡을 떠올릴 만큼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했다.

지친 발아래를 위로하듯

길은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했다.

 

 

 

 

 

 

 

 

 

 

 

 

진통제를 세번 먹고서야

이번 종주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나를 땅에다 잡아 맨것은 무엇이고

나를 나아가게 한것이 무엇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내 두 다리의 고통은 심장을 통해 순화 되고

머리를 통해 환상으로 바뀌어 갔다.

진통제는 이런 순환 경로 속에서

 촉매제로 작용한 것일까?

 

나는 걸을 수 없을 만큼 아픈 순간에도

다시 걸을 수 있을것이란걸 예감했고

그것은 일종의 암시였다.

 

 나는 용케 걷고 또 잘 걸었다.

이것은 이미 짧지 않은 수련을 통해

다달은 하나의 습관이다.

 

운문 지맥에서의 일박 이일.

앞으로 또 어떤 다이나믹한 코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산은

다음에 오를 산인것만은 분명하다.

상상은 늘 즐거움을 준다.

산은 그런 상상의 근원이다.

 

 

 

 

17시 51분 

 

봉의 저수지 다 와서야

내 몸에 비로소 물 냄새, 나무 냄새가 묻어 왔음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일박 이일 동안 밟고 지나 온 여러 산들의

흙 냄새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냄새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지나온 산들을 죽 둘러 보았다.

 

물은 여전히 잘 흐르고

산은 짙푸르기만 하다.

 

산은 이내 내 모습 보고

잠시 시간을 멈추어

나를 배웅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것은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다. 

세상이 모두 다 제대로이니 보기에도 좋았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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