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오르는 산/산행

덕유산 종주기

poll™ 2010. 3. 3. 13:19

 

 

 

 

 

번연의 천로역정을 아직 읽은 바 없으나

글을 쓰기에 앞서

자꾸 천로 역정이란 단어를 되뇌이게됩니다.

 

비록 종주길이라고는해도 결국은 현세로 회귀하는 되돌이 길이지만

먼 천로에 이르는 역정처럼

전대미문의 고달프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무미하고 삭막한 가운데

LP레코더를 따라도는 바늘처럼

나는 내가 내는 소리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2010.02.28. 9시17분

 

덕유산 종주에 나서기에 앞서 코스에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육십령에서 남덕유를 거쳐 향적봉으로 가는 코스를 우선 생각했으나

삿갓재 대피소가 워낙 남덕유 쪽에 치우쳐 있는 바람에

이럴 경우 뒷날 산행길이 너무 길어져

반대로 육십령 쪽으로 서진하는 방향을 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곤돌라로 향적봉에 오르는 방법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자칫하면 차례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귀중한 시간을 빼앗겨버리기 때문이다.

 

백련사에서 향적봉에 올라 서진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고

영각사에서 남덕유를 거쳐 향적봉,백련사코스로 가는 하루짜리 산행도 생각해 봤다.

그러던 중

백두대간을 타고다니는 속칭 바람난 을 만나

마침내 백두대간 구간인 秀峰(빼재)에서 송계 삼거리를 거쳐 육십령으로 서진하는 코스로  결정하였다.

장장 33km의 긴 길이었다. 

 

 

 

 

 

 빼재에서의 雲海

 

들머리는

 인적이 없는 소박한 길이었다.

산길에 사람이 없으니

마치 산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깍이고 자라나

한번 놓인 자리에 영원히 꿈쩍않고 자리 잡을듯한

맑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갈미봉 

2010.02.28.11시 30분 

 

빙그레 홍조처럼 부드러운 봄날

나는 세상을 파벽하고 흘러나오는 쇼팽의 피아노곡처럼

과묵한 고요를 들고

용케 산을 오릅니다.

 

봄바람은 신명난 처녀처럼,

나비처럼

모처럼 거풍나온 요이불처럼 가볍습니다.

누군가 말한 무한 바깥의 기분을

제대로 느낍니다.

 

 

 

 

 

운무에 가렸던 세상이 살짝 드러나 보입니다.

역절적이게도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세상을 높이 보는법을 가르치는것이 아니라

세상을 낮게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대봉에서

 

2010.02.28 12시 12분

 

대봉에서 깁밥 한줄로 점심을 때우며 지금까지 애써 걸어 온 길을

되짚어 봅니다.

 지도를 펼치자 동쪽 끝 빼재에서 영일만 토끼 꼬리 만큼

겨우 지나온 길이 보입니다.

 

북덕유와 만나는 송계 삼거리까지는

앞으로 엄청난 길이 남아있는데

벌써 정오를 지났으니

남아 있는 저 긴 산행길을 오늘 하루에 어떻게 다 채운단 말인가요.

뭔가 잘못 되었다는 불길한 생각에 선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향적봉,설천봉, 중봉

 

 

 

 

 

 

 

 

 

 

 

 대봉을 지나며 덕유산의 완강함을 느끼게 됩니다.

완강함이야 언젠가 제 풀에 지치기 마련이지만

산의 속살에 근접할수록

우리는 더없이 두터운 저항감을 받습니다.

덕유산은 이런 고집스런 완강함을 몰래 감춘채

너그럽기만 합니다.

 

 

 

대봉에서 바라 본 송계사 지구

 

 

 

 

 

 못봉

 

2010.02.28 14시04분

 

 

 

 

 

 가도 가도 끝없는 진창길

차라리 늪이라 부를만 하다.

 

진창을 피해 길옆을 돌아가자니 시간이 또 발목을 잡았다.

뻘이 등산화 밑바닥에 쩍쩍 소리를 내며 달라붙는다.

대단한 점성이다.

 

신발에 흙이 붙어 다리가 한짐이된다.

앞으로 족히 일곱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는 계산인데

아무리 서둘러 걷는다하여도

대피소에는 10시나 되어야 도달할것 같다.

 

야간 산행

길의 여건이나 내 몸의 상태를 볼 때

야간 산행이 산행 말미에 잡혀있다는 것은 치명적 골칫거리이다.

말초신경염을 앓고있는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맛있는 음식은 아껴두고 뒤에 먹는 법인데

고통의 쓴맛만을 톡톡히 남겨두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

 

 

 

 

 

 넘어야할 산들이 숙제처럼 남아있다.

좌측 멀리 남덕유산이 보인다.

너무 많은 숙제를 내 준 선생님을 원망하는 기분으로

산을 향해 장 탄식을 토해낸다.

 

가도 가도 길은 제자리에서 겉도는 기분이다.

연휴임에도 산을 다니는 사람도 더물다.

한참을 가서야 곤돌라로 향적봉에 오른 몇몇 단체 산행팀을 만났다.

오랜 만에 깨진 적막이었다.

 

 

 

 

 가야 할 길

 

송계 삼거리는 멀기만 하고 능선은 코끼리의 허리처럼

풍성하기만 하다.

 

북 덕유쪽의 능선과 고개 너머에서 마주칠듯하다.

숨 쉴틈 없이 서둘러 걷건만

정작 길은 무서우리만큼 가까와 지지 않는다.

 

산은 여전히 근골이 장대한 거인처럼 누워있다.

단단함을 둘러싼 부드러움.

이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부조화가 묘하게 마음을 끈다.

 

 

 

 

 

 걸어 온 길 되돌아 보기

 

 오르다만 산의 남은 길이 아깝거던

내 마음의 찌꺼기를

우선 털어 볼 일이다.

 

산은 내 몸의 무거움을 알게하고,

가볍게 털어 낸 마음이야 말로

내 몸을 세우는 지렛대이다.

 

 

 

 

 

 

 

 

 

 오후의 첩첩산중

 

 

 

 

 

 

북덕유의 능선이 부드럽게 다가온다.

 향적봉 중봉쪽에서 뻗어나온 능선이

비로소 송계 삼거리에서 친근하게 만난다.

봄기운이 연연한 노견에서

당최 해갈될것 같지 않은 물을 마시고 또 마신다.

 

 

 

 

송계삼거리

2010.02.28.16시 56분

 

 

내일은 비가 온다는 예보이지만

하늘은 산돌림 한 줄금 지나갈것 같지 않은 날씨이다.

정월 대보름인 오늘

파란 달빛아래

드뷔시를 떠올리며 산길을 걸을 생각에 약간 행복했지만

뒤미쳐 서둘러라는

무전기의 기계음이 아름다운 환상을 금새 깨트려버린다.

 

 

 

 

송계 삼거리 지나 아득한 나아갈 길 

 

 

 

 

 

 길고 아름다운 저녁이 옵니다.

 

이방의 낯선 바람이 일렁입니다.

 

나는 나를 알아볼 때를 기다리는듯

정처없이 걷습니다.

 

나를 깨우는 산새 소리

박무에 몸을 트는 능선.

 

길고 아름다운 저녁이 옵니다.

 

  

 

 

 옥양목처럼 팽팽하던 하늘 끝도 마침내 허물어지고

마치 산새가 놀라 날아오르듯

그가 보인다.

 

이즈음엔 바람도 비수같다.

알수없는 슬픔이 숨어있어서인지

오늘은 황금빛 노을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저 길 멀리 사라진 뒤에도

이 길에 내 청춘 한조각쯤 남아있을까.

 

청춘이라하기에는 염치없고

젊음이라 부르기에도 가당치도 않는

이 값싼 열망. 

 

 산을 넘는 슬픈  바람소리.

 

 

 

 

 

안주 먼저 떨어지고

깡소주로 마시던 술도 떨어지고

돈 마져 떨어진

꼭 그기분으로 밤을 준비한다.

 

가만 생각하니

남은거라곤 쉰을 훌쩍 넘은 병던 몸뚱아리 하나.

그 몸 하나 믿고 오늘 밤 산중에서 너스레를 떨 참이다.

산이 이몸을 온전히 받아 줄까.

 

  

 

 

 

 

 

 

 

 

동업령

2010.02.28.17시56분

 

동업령지나 무룡산 가는 길에서 밤길을 걱정합니다.

길은 여전히 눈과 흙을 짖이겨 만든 반죽처럼 질척거립니다.

북쪽사면을 걸으면 눈과 얼음이,

남쪽 사면에서는 이런 진창길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도무지 속력을 내려해도 길은 속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속도 감시계 아래를 지나는 자동차처럼

우리는 꼼짝없이 정속 운행합니다.

 

 

 

 

갈길은 아득한데

산중에 밤이 내립니다.

 

밤이 그냥 오는것이 아니라 짙은 구름을 함께 몰고 왔습니다.

대보름 달은 늙은 여우의 눈으로 동남쪽 하늘에서 휘비칩니다.

 

어둠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격리시키자

우리는 비늘처럼 감각을 곧추세워 발 아래로 정신을 집중시킵니다.

 

벌써 산고개를 몇개나 넘었는데도 무룡산이 어딘지조차 모르겠습니다.

힘은 고갈되고 물도, 먹을것도 바닥이 났습니다.

오로지 내 본래의 가진 힘에 의존해 우리는 밤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심술궂은 안개비와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칩니다.

한걸음 한걸음이 내 한계입니다.

나는 10cm도 오르기 힘든 고통을 감내합니다.

 

내 한계의 끝에서 뱀의 혀를 가진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나는 그 욕망의 힘에 이끌려 나를 또 밀어 올립니다.

 

한계 또 나의 한계.

그 한계의 한계를 한겹 한겹 벗겨내며

나는 밤길을 걷습니다.

갈증을 이겨가며 나는 걷습니다.

배고픔과 졸림을 이겨 가며 걷습니다.

오로지 나 자신에 의존한채

천로의 길을 걷습니다.

희망 위를 걷습니다.

 

 

 

 

 

달콤한 잠

 

 

 

 

 

 

 남덕유 300m아래를 우회해서

 

 

 

 

 작년 겨울에 서봉을 지나며

 

2010.03.01. 13시10분

 

 

 

 

 

 

 2010.03.01.13시29분

 

들고 나며 뿌리는 비도,구름도 한폭의 부드러운 선화입니다.

나는 비바람 때문에 배낭 깊숙이 넣어 둔 카메라를 다시 꺼내듭니다.

유연하게 들이구운 능선들에 붉은 빛이 춤추듯 일렁입니다.

마치 水心을 입은 달빛처럼 으늑하고 화사한 그림자들이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떼어다 붙인것처럼 아름답습니다.

 

 

 

 

 삿갓봉,남덕유,서봉을 한 걸음에 넘어온 우리는

마침내 펼쳐진 화려한 경관에 넋을 잃고 맙니다.

이번 산행의 하이라이트인 할미봉 코스를 남겨두고

다시 한번 전열을 가다듬습니다.

 

어디서 생긴지 모를 용기가

가슴을 뜨겁게 달굽니다.

우리는 달려나가듯 길을 걷습니다.

 

 

 

 

 할미봉은 쉽게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바람을 맞으며 마냥 카메라를 들고 산을 기다릴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실체.

그 무서운 존재감을 어렴풋이 느낀다.

덕유산은 결국 숙제인 모양이다.

나는 산에 올랐으나

산을 결국 보지는 못했다.

萬經을 읽고도

피안에 이르지 못함이다.

 

 

 할미봉 가는 길에

 

 이 세찬 비바람에

이름난 산의 명을 다한 고사목처럼

우듬지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있는 너는 누구인가.

 

오랜 세월 이렇게 견뎌냈다는 투로

자못 묵중하게 서 있는 자세는

여간 허무러트릴 기개가 아니다.

 

나도 이런 근기로 버티어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너를 느끼듯

너도 나를 아끼어 다오.

 

 

 

 

 

 .

 

할미봉 암릉 구간을 지나며 

 

 

 

 

 

 

 2010.03.01.15시15분

 

이제 우리의 머리 속에는

두려움을 위해 더 이상 내줄 자리가 없음을 확신한다.

한 세계가 사라지며 또 다른 세계가 경이롭게 다가왔다.

환희에 가까운 성취감.

고난을 같이 겪은 이들의 일체감.

우정.

 

늙은 소나무가 만든 붉고 부드러운 길을 떠올린다.

나는 걷는다

저 달콤한 세계로. 

 

 

 

마침내 육십령

 

 2010.03.01.16시

 

 - 후 기-

 

고난 당한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 71-

 

 

일박 이일 33km의

길고 힘든 길을 걸으며

주의 율례는 미처 배우지 못했으나

고난의 범례와 그 영광은 어렴풋이 깨닫았다.

눈을 녹이는 봄바람이 산행을 축하하듯 신명나게 불어왔다.

千經 萬論이

다 바람 소리다.

 

 

 2010.03.03

 

 

 

 

 

 
                                                                           
                                                                      F. Chopin Nocturnes: No.2 Op. 9/2 in E f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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