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봉회 100차 산행 기념으로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왔다.
지리산 둘레길은 현재 다섯구간이 만들어 진 상태로
이번에 다녀 온 길은
주천-운봉 구간과
운봉-인월 구간이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에서 인월면 인월리를 잇는 구간
말굽처럼 생긴 지리산 능선 중 서북릉 끝자락을 우측으로 조망하며 걷는 14km의 길이다.
그중 우리는 운봉읍 신기리 북촌 마을에서 국악의 성지에 이르는 둑길을 걸었다.
옹기종기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소박한 마을 모습이다.
높지도 넓지도 않은 집들이 고만 고만하게 자리잡고 있다.
동네가 들어 선 그 모습만으로도 깊은 정이 느껴진다.
둘레길을 걸으며
이런 평범하되 결코 가볍지 않은 풍경들을 접하게된다.
마음에 평상심이 자리하듯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의 범례를 접하는것,
이것이 둘레길을 걷는 묘미인 모양이다.
인월로 흐르는 람천.
하얀 명주같은 새털 구름이 나지막한 산세에 어울려
걷는이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마음을 가볍게 털어내고
생각을 단순화 하는 일.
이것이 포행의 핵심이다.
느낌과 의지를 발걸음에 맡긴채
느리게 느리게 마음을 향해 나아간다.
길은 결국 누구나의 마음에 들어있다.
실타래를 풀어내듯
길이란 마음으로 부터 놓여나는 것이기에
나의 길은 늘 내 앞을 향한다.
길이 곧 삶이다.
둘레길 안내 표시
봄이 아직 무르익지 안은 들판 위를 새털 구름이 경쾌하게 떠있다.
가벼운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듯
몸과 마음이 경쾌하기 이를 때 없다.
아무리 빈 마음을 추구한다하여도 저 구름정도의 채워짐은 허락할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채워져 있다는것이 無情 즉 빈 마음이 아니라면
지금 나에게 채워진 저 최소한의 욕망은 무엇일까.
텅빈 마음 속 울림처럼
흰 구름을 삶의 파격으로 삼고 싶다.
녹음 방초, 만화 방창이 곧 봄은 아니다.
봄은 소리로, 바람으로 몸에 스미듯 가까이 온다.
봄길을 걸으며 봄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봄은 내 생각에 앞서 이미 오는 것이니까.
마음의 봄이 언제나 더 빠르다.
이성계의 황산 대첩 기념비각
인월면의 인월은 달을 끌었다하여 引月이라 한다.
이성계가 달빛을 끌어 왜구 적장인 아지발도의 목에
화살을 명중시켜 황산벌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引月이라!
달빛이 서늘히 가슴에 스며드는 밤을 생각해 본다.
피빛에 젖은 달보다는 역시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내 마음 안의 달이 더 어울린다.
비운다는 말이 어려운것 같아도
채우지 않는다라는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새로움이 없이 꽉 채워진 삶.
새것으로 순환되지 않는 삶.
생각부터 질린다.
그러므로 비워진 공간이란
근원적인 허무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생동감과 생산적 삶의 본질을 뜻하는것이다.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터
송흥록은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중시조로
歌王이라 불릴만큼 소리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그의 가문에는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과 같은 명창들이 줄줄이 나왔다.
진양조를 확립한 분이라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그런 류의 느림을 알지 못한다.
비전 마을 당산 나무
늙은 느티나무 우덤지에 걸린 파란 하늘이 참 곱다.
그저 얻는 것의 기쁨.
문득 만나는것의 반가움.
이런것들이 포행의 즐거움이 아닐까.
무심한 시골 길을 걸어가며
나는 나에게 허용된 즐거움의 벽을 넘으려 애쓴다.
발 아래 끙끙대는 일상이 애처로워...
이분의 미소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도
이제 어지간히 나이를 잡수었을테니
이즈음에는 이 분을 닮은 모습이 아닐까.
세월도 비켜 가는 童顔에 파안대소도 여전하시다.
송흥록 생가 앞 조형물
송흥록의 소리는 語勢가 활달하고 강직하며
소리가 웅장하고 가맥에 힘이들었다하여
직선을 상징하는 돌기둥 몇개를 세웠다는데...
모름지기 조형물이란 그것이 놓인 공간으로 부터 무한히 팽창하여
주위와 관계를 이루며 소통될 때 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러나 송흥록 생가 좁은 마당 위의 조형물은
의도만 남아있지 도무지 소통되는 맛이 없어 생뚱맞다.
메주 몇덩어리 가져다 둔들 이보다 빈곤해 보이랴.
아니함만 못하다는 말은 꼭 이런 경우를 위해 만들어진 말인성 싶다.
-국악의 성지에서-
남원의 장독은 거꾸로 엎어놔도 소리를 하는 모양이다.
장독 밑둥 문양이 자진모리를 휘몰아치듯 정겹다.
국악 합주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든다.
산수유 가지 끝에 걸린 권운
높은 하늘, 가벼운 구름
푸른 혈관의 나뭇가지
강을 넘는 사람들
만삭의 봄.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 그늘을 잠시 빌리는 일.
산수유 노란빛도
그 붉은 열매도
시간의 그늘에 잠시 머무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오늘 아내와 더불어 산수유 꽃그늘에서 잠시 쉴란다.
운봉 흥부골 휴양림을 출발해 배너미재-장항마을에 이르는 코스이다.
들머리 조금 지나 백련사를 거쳐 본격적인 산허리 산행이 시작된다.
높지도 낮지도 않는 잘 정리된 봄길을
벗들과 걷는 재미,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어려울 것이다.
오르막을 만나면 오르고
내리막을 만나면 내려선다.
계곡물을 건너
재를 또 넘으니
세상은 無緣한 他者.
꽃도 나무도 말없는 침묵의 세계
봄이 내리는 내 마음의 속뜰.
적멸로 이르는 門
그 깊은 고요.
400년된 노송
노송의 연륜만큼 묵은 우정이 묻어나는 두분이다.
나는 그 아래 오백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땀을 씻는다.
오백년이고 사백년이면
이미 인간의 감성으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세월이지만
남원 땅 이 질곡의 역사 속에서도 나무는 용케 잘 살아남았다.
온갖 위기가 난무하는 이 세상.
우리도 한 백살쯤 먹으면
용케 잘 살았다는 말을 듣게될까.
문득 산다는것이 미꾸라지가 자갈 돌을 빠져나가듯
그저 용한 인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사이한 실상사 입구의 장승
향토 민속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제주도 돌 하루방을 만든 장인의 솜씨이다.
실상사 삼층탑을 위시한 이곳의 석물이야
다 보물로 여길만큼 귀한것이지만
돌장승 또한 그에 못지않게 진귀하고도 흥미롭다.
원래는 마을 어귀에 네개의 돌장승이 서있었다는데 홍수로 하나는 떠내려가고
현재는 세개가 남아있다.
실상사의 봄
봄이 오되 저 돌의 무게로 온다.
萬論의 법문 조차 저 바위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봄꽃의 허무도
봄볓의 갈증도
가볍다 못해 도무지 의심스러운
실상사 봄의 한켠.
호젓한 봄날
오랜 세월 눌러 앉은 古苔처럼 매화향은 은근한데
말할수 없는 너그러움에 끌려
실상사 탑 앞으로 나아갑니다.
견줄 바 없는 아름다움이
절 마당을 가득 채웁니다.
꾸미지 않는 절대적 필요미의 상징처럼
절 어느 구석에도 치졸한 꾸밈이 없습니다.
파석은 파석인채로
낡은것은 낡은 채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결코 오래된 절집의 고루한 아집이 엿보인 다거나
남루로 下品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각자 제 모습으로
탑은 탑인 채
나무는 나무인 채
봄은 봄으로 서로 어울립니다.
이런 곳이야 말로 살아 숨쉬는 공간의 세계입니다.
실상사입니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절집 어느 위치에서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것이 실상사의 탑이다.
차분한 안정감과 시원한 상승감이 주는 비례의 상쾌함.
세상의 욕락을 벗으난 고졸한 아름다움.
千手呪力으로 쪼아만든 이 나라 예술의 결정.
우리는 종교를 떠나 기적이 남긴 아름다움을 향해 경배해야한다.
꽃단청도 아름다우려니와 나는 오히려 화장기 없는
금당의 모습이 좋다.
본당이 이리 소박하니 기타 다른 전각이야 더할나위가 있으랴.
소박하면서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절. 실상사.
실상사는
가식이나 꾸밈이 없는 더 없이 열린 세상
그 화엄의 세상으로 가는 일주문인 셈이다.
나는 눈 앞의 저 주춧돌 위에 앉기를 좋아한다.
여느 절 같았으면 벌써 중창이 이루어 졌으련만
나는 그냥 내버려 둔 이 폐사지에서
오히려 더 깊은 종교를 느낀다.
제멋대로 흩어진 바윗돌 하나 하나에
칠흑같은 침묵이 묻어 있다.
一物이 마음 한구석을 울리는 메아리와 같다.
나는 그 메아리가 돌아오는 저 편의 산을 돌아보며
내 마음 한구석 서걱거리는 울적함에도
칠흑같은 그 고요가 묻어있기를 애써 바란다.
.
-후 기-
철통같은 봄볓을 뚫고 그림자가 자라 나온다.
금새 자라난 그림자가
금지된 욕망 위에서 꺽여진다.
꺽여진것은 더러운 내 삶의 잡동사니
세상을 향해 진 빗더미이다.
그래도 나는 아직 그림자인지
내 한 몸 평화를 위해 빛을 거둔다.
그러나 한편에선
어두움을 죽이는 빛을 준비 중이다.
어두움과 빛을 향한 두 시선
오늘 하루도 이렇게 번다히 지나간다.
지리산 주능선
천왕봉이 마주 보인다.
-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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