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오르는 산/산행

184차 가야산 만물상-칠불봉-상왕봉 산행 후기: 12.12.16

poll™ 2012. 12. 16.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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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흐른다.

아다지오 악장이다.

죽음에 이르는 고독한 느림.

 

모짜르트가 죽기 2개월 전에  완성했다는 이 클라리넷 협주곡.

지난 생을 위로하는 이 보다 더 깊은 관조의 음악이 있을까.

 

때묻지 않은 아주 맑은 죽음의 세계.

그 세계가 가로 놓인 서쪽녘으로부터  생의 근원인듯한 청정함이

뽀얀 소리로 밀려온다.

 

 

 

 

두무산과 오도산

 

 

 

 

 

 

 

 

이어도 처럼,

먼 바다 이상의 섬, 이어도처럼

지리산의 주 능선이 물결 속에 잠든듯 우련하다.

 

먼 곳은

지극한 생략 속으로 사라지고

구름으로 가리워진 세상은

 또 긴 겨울의 꿈을 꾸고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이 가리워진 만큼

나 또한 세상으로부터 가리워졌을까?

 

가식에 익숙한 글들,

거짓을 진실처럼 위장하는 양심,

허위의 세상을 변호하는

짙은 치장이

세상을 건너와 위태로이 나를 감는다.

 

 

 

 

 

 

 

곰팡이가 햇볓에 시들듯

거짓에 점철된 내 삶의 신앙들이

힘을 잃고 졸아든다.

아니 아주  타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왜  作爲의 세계가 편안한 걸까

내가 사는 세계는 단지 내가 만든 허위의 세상일 뿐인데.

 

내가 상상하고

내가 만들어낸 거짓의 세계.

 

그럼에도 나는 하얀 고치 속에 사는 누에처럼

그 작위들을 생명인듯 믿고 신봉한다.

아니 깨어나는것이 두려운지 모른다.

 

세상이 아는 나의 모습

내가 끝없이 의심하는 그 작위.

 

 하늘로 부터 작위를 도려낼  위대한 칼날이

 깊고 아련한 아픔으로 다가오는듯다.

 

한때는 내 몸이었던 이빨이

딸랑하며 깡통 속에 떨어질 때

그 때의  알싸함이 싸늘하게 전해져 온다.

썩어버린 이빨처럼

내속에서 가공된 나를 뽑아버릴 참이다.

 

 

 

 

 

 

 

진실과 작위의 세계 사이에는

단지 하나의 금만이 존재한다.

 

그 선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은 아니다.

가공되지않은 진실과

내가 그랬으면 하는 희망의 경계선이다.

 

하나의 거친 마루금 너머로

또 수많은 마루금이 놓여있듯

작위는 작위를 낳고

번식을 거듭하여

나는 나조차 알 수 없는 다른 모습의 내가되어

세상 앞에 서 있다.

 

 

 

 

 

 

산은 산인대로

변함없는 산인데

나는 비로소 누구인가?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내가 산으로 부터 얻어려는것은

변하지 않음,즉 불멸의 가치이다.

 

비바람으로도

눈보라 속에서도

결코 변화하지 않는것.

불변의 관념이다.

 

'늘', '변함없음'과 같은 항상성

그 항상성에 대비되는것이야말로

나 자신이다.

 

변화 무상함

변용됨.

작위적인.

 

 

 

 

 

 

 

 

 

 

 

 

그 항상성의 가치 위에

사랑이 놓여있다하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비록 사랑이 불변의 가치를 지닌다해도

산을 설명하기에는

사랑은 어쩐지 속요같다.

 

산의 느낌은

이런 확고부동함으로부터 나오고

이것이야말로 건드릴 수 없는 산의 절대적인 면모다.

 

 

 

 

 

산이  이럴진데

강이며,바다며.,강물이며.돌이며,나무

하물며  인간으로서의 나는 어떻겠나.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人性 또한

청정무구한 불변의 존재로

절대적인것이어야한다.

 

사계가 바뀌어 산하의 외경이 바뀐다고 하여

본질이 바뀌지 않듯

환경에 따라 면모가 일신한다하여도

人性의 본질이 바뀌어서는 안된다.

 

 

 

 

 

만물상

 

 

인간이 만물의 척도란 뜻은

인간이 세상 만물을 반영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 만물을 반영한다고 하여

인간이 만물인것은 아니다.

만물은 인간의 마음에 드리운 그림자에 불과하다.

 

나에게 드리운 세상의 그림자들을 하나씩 지우고

오로지 청정한 마음을 세우는것이

수양이요

나는 그 수단을 걸음을 통해 얻는다.

 

걸음을 통한 수행 수단인 포행은 세상의 틈을 느리게 걷는  명상법이다

걸음을 통해 나 자신을 보는것이다.

 

 

 

 

 

 

만물상을 통해 보아야하는것은 세상 만물의 모습이 아니라

작위에 매몰된 나 자신의 정직한 모습이다.

 

위대한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세상은 다시 관습의 세계로 귀환한다.

 

목표도 본질도 없는 삶들은

거짓과 작위로 쉽게 가공된다.

 

세계를 지시하는 방향성과 실재성이

나도 모르는 사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것이다.

 

그래서 만물상은 카오스요

관습의 상징이다.

 

관습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서는 안된다는것은

일종의 종교적 목표이다.

 

만물상은 만물을 바라보는 관습 위에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만물에대한 관습적 시각을 타파하기 위해 존재하는것이다.

 

 

 

 

 

 

 

 

 

 

 

 

 

 

 

나는 건들거리며 걷고 싶다.

저 불량한 바람처럼.

 

아무도 순치시키지 못할

거친 원시적 힘만으로

세상을 이겨내고 싶다.

 

궁벽한 삶이면 또 어떻랴

기도는

땅속 깊이 뿌리 박고 선 나무처럼

제 스스로의 소리를 듣는것.

 

바위처럼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뚜벅 뚜벅 내 갈 길을 걸어가고 싶다.

 

 

 

 

 

 

삶에 상처와 결핍이 없다면

詩가 또 무슨 소용이랴.

 

이 상처와  결핍이 정처없이 떠도는 시간이

딱 지금의 계절이다.

 

죽음이 그러하듯

세계에 부유하는 허무의 덩어리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날씨 탓인지도 모르겠다.

덧없고 정처없음이 인간의 숙명일진데

세상은 정처를 만들고 또  머물지 못할 허무를 만들었다.

 

정처가 없는 삶이기에 허무하다.

또 그렇게 허무한것이기에

삶 또한 떠도는것인가 보다.

 

 

 

 

 

 

 

定處란 누군가 나를 불러줄 골목길이요,

마주 앉아 기울이는 술잔  속 위로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고 싶지 않은  바로 지금 이곳이 내 정처일까?

 

저 푸른 청옥처럼

거친 칼바람을 이고 서 있는

칠불의 봉우리들이 내 정처일까?

 

마음 가는곳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

언제 한번 가고픈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인들 어떻랴

定處란 결국 내 마음 속에 있는것을.

 

 

 

 

 

서성재 지나 칠불봉에 이르는 능선에는

잔설이 녹아 진창을 이루었다.

 

응달진 곳에는 지뢰처럼 얼음이 남아 산행을 방해했다.

조바심이 나는 중에서도 南方의 수려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려하다고는 하지만 화려하거나 장식적 감탄으로 結句할 풍경이 아니라

순박한 온기가 오롯이 담긴 풍경이었다.

 

'질박하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것 같은 향수를 자극하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눈을 다시 서쪽으로 돌리면

풍경이 부드러움을 얻기 위해 또 얼마나 긴 질곡의 세월이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거친 비늘같은 힘들이  존재했다.

 장정들의 강건함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풍경은 어찌해 멀어지며 부드러워지는걸까?

나는 저 느리게 멀어지며 안정을 찾아가는 풍경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역사의 유장함을 느꼈다.

 

 

 

 

 

두무산-오도산-비계산의 마루금

 

 

수많은 산과 마루금이 마치 제 이름을 맞추어 보란듯이

어지럽게 흘러다닌다.

 

세상 모든 산에 이름이 있는것도 아니요,

설사 이름이 있다하여도 내가 다 알수는 없지만

내가 산의 이름을 제대로 맞힐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산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있을것 같았다.

 

산을 다 가질수는 없다.

산을 가진다는것은 산을 향한 자기 기만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을 알아가야한다.

인간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산도 서로 견고한 맥을 이루며

관계를 이룬다.

 

나는 이런 산과 산의 관계를 통해 산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아주 멀리 남덕유산으로 짐작되는 봉우리 하나가

구름 속에 웅자를 드러내고 있다.

 

그 산이 남덕유산이던 아니던

그만한 위용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남덕유라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의 가파름이 처음 가야산을 찾았을 때의 추억을 되살렸지만

풍경이 사뭇 낯설다.

길이 변한것만 같다.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할 칠불봉은 오히려

머리 꼭대기에 서 있고

계단을 올라가며 아득했던 계곡 저편의 모습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산이 변할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변했다면

내 기억력이 변했거나 산길이 분명 새로 났을터이다.

 

현상을 되돌리는데

기억은 이렇게도 불완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어떤 산을 한번 올랐다는것은

단지 그 산을 한번 경험했다것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산은 무궁무진한 변수를 지닌다.

우리는 단지 그 수많은 모습 중에 하나의 면모를 체험할 뿐이다.

 

 

 

 

 

 

산을 통해 우리가 얻는것은 一期의 기쁨이다.

그러나 이런 一期一喜의 소중함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일희야말로 대각의 원천이요

깨닫음의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두가지 종류의 변화가 있다.

하나는 바뀌는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고치는것이다.

 

바뀌는것은 내용이나 상태,성격등이 완전히 달라지는것을 의미한다.

이에비해

고친다는것은 보다 지엽적인 변화를 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번의 산행을 통해  돈오의 각성을 이루었다하여도

돈오를 있게한 근본적인 수행 프레임이 갖추어져야한다.

 

깨닫음의 가치가 인정될 때

그 깨닫음의 진정성이 확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이런 깨닫음을 인정해줄 수 있는

스승을 필요로 한다.

 

한번의 각성을 통해 얻는 희열은

세상 무엇으로도 바꿀 수없는 단단한것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금강에 비유한다.

 

절대 진리인것이다.

 

문제는 이 진리의 절대성이 문자로 전달될수 없는것이기에

보편화된 지식으로 천착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대오의 상태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과 시선이 일시에 바뀌어버린

자아확립의 상태.

이 상태를 큰 깨닫음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같은 범속에 있어서 산행이란 오히려

漸修(점수:점진적 수양)에 가깝다.

 

생각이나 철학이 확 뒤바뀌기 보다는

 천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가는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산 中의 모난 바위가

구르고 굴러 바닷가의 조약돌이 되듯

매번 산을 오를 때마다

一新하는 자신을 발견해야한다.

 

그러나 이 변화를 눈치채지못한다면

즉 다시말해 一新의 자각이 없는 산행이라면

산행이란 그저 관습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칠불봉 위에서 상왕봉쪽을 본 모습

 

맨 뒤에 보이는 소박한 유부초밥 모양의 봉우리가 상왕봉이다.

 

 

 

 

날렵한 봉우리들 뒤로 덕유산의 유려한 능선이

천계를 구획하듯 지나간다.

 

 

 

 

 

 

 

 

 

 

 

 

 

칠불봉 봉우리에서 마침애 바다를 보았다.

 

 

한치의 막힘이 없는 세상이다.

세상을 만져본다.

 막힘없음이 손끝에서 감각된다.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가 먼 곳이 아닌

바로 내곁에 있다는듯

맑은 기운이 나를 일깨웠다.

 

세월의 나이테로 둘러싸인

내 몸이 해체되는듯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하오의 태양이 내 등뒤의 쓸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내 늙음을 확인하기 위해,

또는 허무하게 보낸 세월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서있는것처럼

세상은 고즈넉하고,적막하고,아득했다.

 

몸을 흔드는 작은 가지

아주 흐리게 보이는 세상의 먼 끝.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몽환적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仙界가 있을리 만무하지만

인간이 만든 선계의 개념이 있다면

이런 곳이야말로 선계일거란 생각이 들 정도 였다.

 

 

 

 

 

 

삶은 누가 먹어도 어울리는 국수처럼

편안한 것이었나보다.

 

사랑도

낯선 무덤처럼 담담하다.

 

산은 도대체 왜 나를 삭인 술처럼

만들었는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

 내게는 아직도 통증인데.

 

 

 

 

 

 

 

 

 

 

칠불봉을 내려서 상왕봉으로 가는길은 은근히 응달져

길이 미끄러웠다.

 

먼저 하산한 사람들을 따라 잡을 길없어

칠불봉에서 하산하려했지만

가야산이 초행인 동료를 생각해서라도

상왕봉을 둘러와야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눈치챈듯

미끄러운 길이 내 발목을 잡고 시간을 농단했다.

 

산행의 즐거움을 자포자기로 대체한다는것은 언어도단이다.

늦은것은 이미 늦은것이고

늦은 시간을 대체할 적당한 구실들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기막힌 풍경 앞에는 어떤 구차한 구실들도

다 덧없는것임을 곧 느낄수 있었다.

 

CARPE DIEM

어떤 구실보다 더 멋진 말이 떠올랐다.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으니

다만 하늘에 맡길 수 밖에.

 

그 즐거운 현재가 산정에는 산적해있고

산 아래의 저 푸르디 푸른 세상은

저 혼자의 멋으로도 흥겨운듯

마음껏 생기를 자랑하고 있는데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던

나는 즐겁다.

즐겁고도 즐겁다.

 

 

 

 

우두봉 정상의 볼품없는 자태

 

그 자태가 볼품없어 쇠머리에 비유했을까

 

 

 

 

 

아름다운 덕유능선

 

 

 

 

 

 

감탄에 빠지게 되면 이것도 하나의 탄식인지라

사소한 무엇인가도 하기 싫어져버린다.

 

가령 우두봉 정상석에서 바로 그 너머의 산봉우리로

넘어가고 싶어도 몸 하나 일으키기 귀찮아져

제 아무리 수려한 풍경이 바로 뒤에 놓여있다하여도

뭐 다 그만 그만한 풍경이겠지 하며

심리적 보상을 하고 만다.

 

바로 저 앞의 봉우리까지 나아간다면

마치 나는 땅끝에 서있는듯한 스릴과

또 있을지 모를 감개를 무량하게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 마음은 꽉 차버린 위처럼

아무리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한술도 더 뜨고 싶지않을 만큼

이미 포화상태였다.

 

 

 

 

 

 

 

 

 

 

 

 

 

 

 

우두봉 정상석 아래에서 물에 밥을 말아

고들빼기랑 밥을 말아먹던 생각이 났다.

 

밥을 먹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의 불과 몇분은 지금도 여전히 불과 몇분이지만

그때와 지금의 시간 간격은

마치 10년의 시간이 10분 사이에 흘러간것처럼

엄청난 압력으로 응축되었다.

 

불과 엊그제처럼 느껴지는 과거를

타임머신을 타고 온듯 생생하게 넓은 바위 위에서

되살려냈다.

 

 

 

 

 

산에 오르면

나는 먼 시선이 좋아.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피어난 꽃과 같고

나는 위로받아.

 

좀 외롭게 살면 어때.

 

확 트인 산꼭대기에서

오가는 바람,

하늘 지나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런 느슨함으로 살고 싶어.

 

언젠가 엿가락처럼 부러질 목숨.

숨가쁜 세월

산 위에서 모두 잊고

 

마음같아선

천년 만년 여기살다

그냥 구름이라도 되고싶어.

 

 

 

 

 

 

 

산의 이름 앞에 붙이는 어떠한 관형사도

산의 층위를 세우는 허영에 불과하다.

 

기쁨을 위해서는

一山이면 족하다.

 

산은 언제나 즐거움을 준다.

아니

 산을 통해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그 즐거움의 그림자가 멀리

지리산 상단까지 내려와 있었다.

 

 

 

 

 

 

 

 

 

 

 

 

 

 

 

- 후 기 -

 

 

너 답게 살아가라

선지자의 세계를 기웃거리지 마라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우리 그렇게 사는것이다.

그것이 세상조화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제2악장 Ada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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