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는 동화사,갑사,신원사,수덕사와 함께 충남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춘마곡 추갑사'라 불릴만큼 봄경치가 빼어난 마곡사지만 가을의 마곡사를 찾게되었다.
삽상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가을은 막차를 기다리는 환승역처럼 분주했다.
대한 의사 산악회 대표자 회의라는 나와 별 관계가 없는 모임이지만
간만에 산행에 나선 나를 일행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麻谷寺란 이름은 자장율사가 사찰을 개산하고 보철화상이 설법할 때
그 설법을 들으려 사람들이 삼대처럼 빼꼭이 들어섰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란다.
歡樂極兮哀情多
환락극혜애정다
환락이 극에 달하면 슬픔의 정이 많아진다는 한무제의 秋風辭가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허무를 채울 수 없는것이 어디 사치와 향락 뿐이랴.
세상 만물이 적멸의 空性을 웅변하는데
더 할것도 덜 할것도 없는 정화된 관념어가
가을 한자락을 함초롬이 베어 물고있다.
백련암 가는 갈림길
백련암 가는 길에 시든 백련 몇 포기가 추위에 쓰러져 가고 있었다.
꺽인 채 죽어가는 백련 줄기 위에 하얀 연꽃 송이가 아련했다.
사랑은 뜨거울 때 그리워지는것이 아니라
이렇게 식어가면서도 그리워 질 수 있다.
아주 식어버려
냉골의 시간을 뒤척일 때
그 싸늘하게 떨리던 고엽 끝에도
그리움은 찾아온다.
나는 알았다.
바람부는 늦가을 길섶에서.
한없이 안달하던
뜨거운 사랑의 허위를.
백련암
마곡사하면 빼어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백범이다.
을미사변으로 국모를 잃은 앙갚음으로
21세 청년 김구(당시 김창수)는 일본 육군 중위 츠치다 죠스케를
잔인하게 보복 살해한다.
일설에는 그 피를 마셨다고도 한다.
그는 스스로 방을 붙여 자기가 살인범임을 당당히 밝히고는 집에서 칩거하다
석달 뒤 해주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인천 형무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던 김구에게
두가지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는 고종의 사형 재가가 떨어진 직후 승지의 눈에
김구의 죄명이 단순 살인이 아닌 국모보수 즉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였다는 넉자가 눈에 띄였다는것과
때마침 사흘 전에 인천과 서울 사이의 전화선이 개통되어
고종의 전화 한통으로 사형 직전의 김구를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사형에서 감형된 김구는 옥살이를 하던 중
감옥 바닥을 뜯어내고 탈출에 성공한다.
그 뒤 도피처로 택한 곳이 마곡사였고
여기서 그는 삭발하고 스님 생활 한 반년하고는
금강산으로 간다며 마곡사를 떠났다.
그 후 그는 평양을 거쳐 전국을 떠돌다 마침내 중국으로 가 조국 광복 운동에 참여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백련암 뒤 마애불
참 소박한 모습이다.
기도
백련암이 있는 풍경
深入緣起
세상 만사 인연의 소치 아닌 바가 있겠는가
저 빛 하나,나무 하나 ,절집의 배치 하나 인연 아닌것이 없다.
자유로이 훨 훨 날아 다닐것 같은 나비 한마리도
사실은 인연의 족쇄에 꼼짝없이 매인 처지다.
사진도 그렇다.
잡다한 빛들이 난삽한 인연처럼 어울려
생각을 어지럽히면
오히려 有無二邊의 흑백논리가 더 속 편할 때가 있다.
유무이변의 풍경같지 않은 풍경을 마음에 딱 걸어두고 생각한다.
하나를 생각하고
습관처럼 둘을 떠올리는것과
세상을 두가지로 구분하여 생각을 정리하는것은 다소 다르다.
망상으로 망상을 다스리는것이 화두이듯
어둠의 빛으로 밝음을 강조하고
빛으로 어둠의 콘트라스트를 도드라지게 한다.
부처의 지혜가 밝은것은 세상이 어둡기 때문이다.
가장 큰 빛이 있는 곳을 대광 보전이라 하지 않는가.
백련암이 하얀 백련처럼 눈부신 오전
산을 오르는 마음이 모처럼 차분하다.
생멸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라도 기다릴듯
낙옆은 누워있다.
생멸의 法을 기다리는것일까
누운 그자리에서 大悟를 이룬듯 하다.
"죽음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살아있는 한 사랑해 주세요.
나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낙엽을 밟는 발 아래가 운다.
할인봉
나발봉
산행은 습관에 반해 인생의 진정한 가치에 촛점을 재조정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이 있다.
더 소중하고 더 가치있는 도덕적 기준을 마련해 준다
산행은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 사건에 직면할 때 보다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지침이 된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라는 공정한 룰을 가르친다.
산은 우리에게 이룰 수 없는 상황을 미화하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이겨내야하는 삶의 고비로부터 인생의 진정성을 지켜주는 힘이된다.
마치 죽음이 삶의 한가운데 있는것처럼
억새가 홀연히 빛났다.
노도처럼 밀려다니던 시간의 질주가
여울을 만난 물처럼 머뭇거린다.
미래에 펼쳐질 우리의 현실,
그 흘러갈만한 경로를 조금이라도 잘 이해한다면
삶을 질주하는 시간의 힘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 있는걸까.
풍경과 더불어 내 발걸음이 안상하다.
자연이야말로 내 빈곤한 상상력의 선구자요 예레미아다.
풍경이 있기에 풍경에 비친 내가 보인다.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내가 다 보인다.
길은 세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모른다.
대신 눈 앞에 명백히 놓인 소중한 진리를
알아차릴것을 권한다.
세상의 온갖 신실한것들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우리는 진리를 한 순간에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기는 힘들지만
산길을 걷듯 꾸준히 익혀가다보면
소리꾼이 어느 순간에 득음의 경지에 들듯
우리의 삶이 진리의 반석 위에 놓일 날이 올것이다.
떠나갈 때를 알고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처럼
가을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가을이 멀어진다는것은 마음으로 부터 떠난다는것.
회자정리, 생자필멸의 滅離(멸리)를 감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攻防에 지친 전장처럼 숲은 허무하고
결별이 생멸의 분별을 일깨울 때
가을은 참 가을답게 사라져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매를 맺었던 혹은 그렇지 않던
가을은 겨울을 향하여
잎을 떨구어 장엄한 열반을 보임으로써 비로소 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생멸을 통해 나지도 없어지도 않은 영원한 진리의 자리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고 깨닫을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천변만화의 생멸의 순간을 나는 다만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낙엽이 무리져 흩어집니다.
바람없어도 낙엽은 지고
바람이 불면 큰 북처럼 내 가슴을 치며 떨어집니다.
소리없는 낙엽이 가슴을 치고있습니다.
숲은 비로소 세간상을 넘어
생멸을 통해 생멸의 空함을 보여줍니다.
그런 길을 걷습니다.
걷고 또 걷습니다.
느린 걸음으로 포행 삼매에 젖어듭니다.
화엄에 빠지면 화엄 삼매를 얻고
능엄에 빠지게되면 능엄 삼매에 들게 되듯
나는 느린 걸음을 통해
삼매에 들것입니다.
그리하여
길 끝 어딘가에 천만근의 진중한 무게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生의 一覺을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마곡사
마곡사 대웅보전 안의 싸리나무는
사람의 손 때가 묻어 반질 반질하다.
싸리나무 기둥을 잡고 돌면 수명이 연장되고 극락에 간다는 속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싸리나무는 싸리 빗자루나 만들정도로
가는 가지로 이루어진 관목인데
어떻게 절집 기둥으로 쓰인단 말인가.
절에서 싸리나무라 하는것은
사리함을 만든 느티나무를 사리나무라고 부르다
싸리 나무와 혼용된 것이다.
절간의 싸리나무 구시라는것도
알고 보면 다 참나무나 소나무로 만들어지것이다.
대광보전 기둥에 씌어진 주련이 보인다.
중앙 기둥에는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의 글귀가 씌여져 있는데
물러나 세상을 돌아보니 모두가 꿈속 일과 같다는 뜻으로
해방 후 1946년 백범이 마곡사를 다시 찾아 주련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을 두고 씌여진 글같다고 회상하였다 한다.
보물 799호의 마곡사 오층탑
라마불교 양식을 딴 고려말의 불탑이다.
머리부분의 푸마동이 없었다면
정말 단조로운 탑이 될 뻔 했다.
좌우간 우리나라에 하나 뿐인 희귀한 양식의 탑이다.
고려 시대 불탑의 특징인 다층구조는 자칫 지루하고 단조로와 보이는 흠결이 있다.
부여 무량사지탑이나 오대산 월정사 팔각 9층탑, 경천사지 10층 석탑등을 제외하면
융성했던 불교문화 수준에 비해 미적 완성도가 높은 탑이 별 많지 않다.
대광보전 지붕 가운데를 잘 보면 청기와 한장이 얹혀있다.
이것이 소위 마곡사 극락행 티켓인데
훗날 염라대왕 앞에 섰을 때 마곡사 대광보전 청기와를 보았느냐고 물으면
'보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면 지옥갈 사람도 극락에 간다고 하니
못보신 분들은 새겨 들으시고 혹시 그날이 오면 꼭 보았다고 답하시도록.
지붕 꼭데기 ㅁ자로 보이는 곳이 청기와가 올려진 곳이니 잘 보시고 다 모두 극락 가세요.
명부전
우리들 모두의 마음 속에 낙원이 있다.
지금 나의 마음 속에도 역시 낙원이 깃들여 있는데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내일이라도
실제로 내 마음 속에 되살아나서
일 평생동안 나는 그런 상태 속에서 살아갈것이다.
도스토에프스키의 말이다.
도스토에프스키의 낙원이야말로 불성이다.
도스토에프스키는 홀연히 마음 속 불성을 본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법화경 사구게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내세란 다음 세상이 아니다.
내 마음 속 불성을 일깨운 바로 다음 순간을 말한다.
적멸이 명부전을 감싸며
마지막 가을을 선물한다.
올 가을 마지막을 마곡사에서 보내게 되었다.
시절인연이다.
절집에서 맞은 인연이기에 더 크고 깊다.
명부전 옆 은행나무
은행잎은 다지고 은행만 주저리 주저리 달려있다.
갈루피/키보드 소나타 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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