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도솔암 내소사 삼사 순례기
마음은 화가와 같아
부산 불교 의사회 정기 삼사 순례
2016.12.25
선운사-도솔암-내소사
선운사 차밭
과잉의 삶이란 없다
다 저마다의 모습 그대로다
잉여도
부족도 아니다.
아니 그 조차도 본 모습이다.
벗들을 청하여
올해로 네번째가 되는 성탄절 삼사 순례길에 나섰다
전라도 고창땅
얼마나 먼 곳인가.
하지만 기어이 가서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던 내 마음의 성지.
몇해 전 그런 마음이 동해 선운산과 선운사를 찾았지만
내 갈증을 다 채우지는 못했다.
한을 다 토해내지 못한 시인의 시가 그랬고
희뿌연 날씨가 그랬다
꽃이 없는 선운사 뒤란의 동백숲이 또 그랬다.
산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 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 갈래
깊은 산속 헤메나
특별히 산행이 없는 날에는 나는 금정산이나 범어사에 자주 놀러간다
자주 다니다 보니 정말 내 마음의 길이 생기고
어떤 길들은 너무 살뜰하여
도무지 누구에게 알려주고 싶지도 않은 그런 길들도 생겼다
그런 길들 중의 하나가 원효암 가는 길이다
선암사에서 도솔암에 이르는 길도
참 운치 있는 길이다
개천에 떨어진 도토리에서 빠져나온 탄닌 때문에 생긴 검은 개천바닥,
그 침묵의 겨울 개천을 바라보자
문득 유리디체가 건너지 못한 황전의 검은 강이 떠올랐다.
첫사랑의 목덜미를 떠올리게하는 푸른 차밭과
아픔의 근원을 찾아가는듯한 느리고 완만한 길,
그 위로 날개짓하듯 겨울답지 않은 햇살이 쏟아졌다.
"그런데 말이야,생명이란 결국 시간을 의미하는것 같아"
풍경이 말을 걸어온다
키 높은 나무의 길 위로 너울같은 시간이 흘렀다
눈에 익은 풍경들이 나비처럼 날아들다 금방 흩어져 버렸다
꿈은 싱겁게 끝이났다.
,
비수기의 절마당은
외람을 떠올리는 객들로 분분했다.
간혹 영감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 온 사람들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후미진 절집 구석 구석을 찾아 헤메었다
절간을 돌아다니다
문득 나를 둘러 싼 낡은 전각의 벽과
그 벽사이의 삭막함을 메워주는 나무나 탑 조차 없었다면
여기가 굳이 산사일 이유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집이 의외로 답답했다
평지사찰류의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나머지
마치 거대한 소금창고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범에 갿힌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인간들의 실루엣이 마주치고
몸을 스치는 그림자들이 부유물처럼 절마당을 떠다녔다.
종잡을 수 없는 무료함이 잠자리처럼 어지러이 날아든다
새로울것이 없었다.
식어버린 차를 마셔야 할 때처럼 기분이 막연했다
멀리 나를 기다리는 아내의 근심에 찬 얼굴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정지되고
풍경이 뿜어내는 쌉쌀하고 해묵은 색깔과 냄새따위가
빛바랜 권능에 적셔진 묘한 원력의 세계로 나를 데려갔다
산은 협시보살처럼 절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결실을 숨긴 동백숲은 하오의 햇살 속에 적막했고
금욕의 방편으로 과거의 습생을 멀리하기로 한 나는
망연히 숲을 바라보며
낯선 쓸쓸함을 곁불처럼 쬐고 있다.
나에게는 부처로 다가갈 권리조차도 없는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불자인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하는가?
목표를 상실한 삶은 부조리한가?
속이 빈 죽비로 내가 나를 때려 본다.
아플 리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절집을 찾은 타인들의 모호한 목적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나를 열람하는 신령한 거인의 존재가 문득 느껴졌다.
이래서는 안된다
묘한 반성이 불현듯 일었다.
선운사 애기 동백은 577년 백제 위덕왕 때 조성된 숲으로
봄이 되어야 꽃을 피우는 춘백이다
고창이 동백나무의 북방 한계인 까닭으로 3,4월이 되어야 꽃이 핀다
그 때문에 절창 선운사 동구가 탄생했을까
서정주도 보지 못했다는
선운사 동백 숲은 꿈꾸듯 고요하다.
오늘도 저 스님들의 땀은
내 땀만큼 짰을까?
세상 사람들 만큼의 번뇌와
또 그만큼의 사랑이
글풍선처럼 떠다니는
하오의 절마당....
내 가슴에
부레옥잠의 팔뚝만큼이라도
희망이라 할만한 것이 있다면
세상을 헤쳐가는 내 두다리가 훨씬 가벼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의 속은
부레옥잠의 초록빛 팔뚝처럼 늘 비어있다
우리는 이 빈것들을 희망이라 부풀려 살아가고 있다
아직 절망의 겨울빛이 성성할 때
이미 봄빛을 보는 시인의 눈처럼
현실의 늪을 피해 솟아오른 처염상정의 그 꽃을
희망이라 여기고 싶다
無明이란 자신을 모르는것인데
자신을 모른다는것은 본래의 모습 즉 자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이다.
무명이 단지 我를 모르는것이라면 큰 착오다.
我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지워야할 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살펴보라는것은 身 즉 오온이 아닌
오온의 근원인 마음밭을 잘 헤아려라는 뜻일게다.
그런데 자성이라는것이 헤아려 다가가는것이 아니지 않은가
卽心是佛 無心是道 라고 하는데
내가 헤아려야할 心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無所從來 亦無所去
점입가경이다
가고 올 곳이 없으니 어디 헤메지 말고 꼼짝말라는 뜻일게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마음의 싹을 틔우고
꽃이 되며 씨가되는 그 곳.
길은 이미 원적산을 넘고
나는 마침내 무위사 일주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올림픽이 끝난 뒤 김연아는
모든것이 끝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행복을 되찾아 준 그 모든것의 종말.
그녀가 그 모든것이라 표현했지만
올림픽이 그녀의 모든 것은 아닐것이다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질투와 분노,승리의 집착을
내려 놓았다는것일테다
방하착하였다는 뜻이 아닐까?
방하착이 주는 안도와 행복,평화를 마침내 느낀것이다
상상해 보면 그녀가 어쩌면 피안에 도착했거나
해탈하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처럼 피안과 해탈이 인간의 궁극적 목표가 아닌 적게는
매 순간 만나는 수많은 근심들의 해결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적 생각이 들었다
보문품에도 우리 중생들의 매 위기 순간
관세음보살을 칭명하여 즉득해탈하였다는 많은 말씀들이 적혀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 내려놓을
그 모든것의 종말은 무엇일까?
내가 방하착해야할 그무엇을 알아야
내려 놓을것이 있을터인데 나의 그 무엇은 오리무중이다.
어쩌면 그 무엇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목적없는 삶이니까.
목적없는 무미한 삶과
버려야할 그 무엇을 쥐고 사는 목적의 삶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처럼 어렵다.
성불은 너무 멀고
발심은 여전히 너무 미약하다
반송
도솔암 툇마루에 앉아 경계를 바라보니
세상 풍경이 한편의 그림처럼 오롯하고
仙界에 앉아있는 나는 중생이니 보살이니 하는 분별도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요즘 읽고 있는 화염경 속 유심게 구절이 떠올랐다.
유심게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오온실종생 무법이불조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여심불역이 여불중생연
응지불여심 체성개무진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有心造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온갖 세상사를 다 그린다네
오온의 육신도 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났으며,
세상의 일체 법, 만들지 못하는것이 없다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네
그러니 응당히 알아야하네.
부처와 마음은 체성이 모두 끝없다는것을.
만약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법계의 본성을 잘 관할 일이네.
모든것은 다 마음따라 변한다는것을.
마음
마음
마음
나는 그림을 그리지도 못하고 사진을 잘 찍을 줄도 모르지만
누구보다도 그림이나 사진을 감상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거의 화가를 만나 본 적이 없으므로
내가 아는 화가들은 늘 그의 그림 속에 있다.
작품을 만나는것이 화가를 만나는것인데
이는 경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는것과 흡사하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감상의 능력을 키워야하는데
감상의 능력이란 한마디로 그림을 설명할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세상에 대한 학습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풍물들이 다 법문이기에
나는 그림을 보듯 세상을 본다.
마음의 조화를 본다.
마음이 움직이면 중생이요,
멈추면 부처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머무르면 秀作이요
움직이면 凡作이다.
화엄경을 펼쳐들고 불과 몇장을 넘기지 않아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차라리 탄식이나 하고 있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엄경은 부처의 깨닫음을 그대로 드러낸 경전이라고 한다
부처의 깨닫음을 이해할려는것 자체가 문제였다
화엄경은 이해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는 경전이었다
입차문래막존지해
범어사 불이문에 왜 이주련을 달았을까
이해가 아닌 믿음
비로소 믿음의 세계가 열렸다
세계를 통해 세계에 접근하는 길을 보여 준것이다
내게 필요한것은
바로 이 믿음이요
믿음을 향한 발심이었다
如是我聞
여시아문의 如是는 곧 믿음을 가르킨다고 한다
여시는 응낙하는 마음이며 받아들임의 단초여서
이것이 곧 믿음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경전 서두의 여시는 맏음을 가지고 이 경을 들어라는 주문일 수 있다.
대승불교의 승각자 나가르주나는
'불법의 大海는 믿음으로 들어가고 믿음으로 건넌다'라고 했다.
응낙하는 마음,받아들이는 마음,곧 믿음의 첫 걸음이라 말할 수 있을것이다.
불법의 산에 들어간다해도
믿음이라는 손이 없고서야
어찌 깨닫음의 보물을 캐겠는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합리적인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
나는 저 큰 불합리의 미륵불 앞에서서
믿음으로 응낙하는 신앙의 힘을 느꼈다.
기쁨과 충만으로 가득찬 마음의 문이 열리며
비로소 부처 앞에 선듯한 큰 자각이 밀려왔다.
겨울 나무도 내 삶만큼 고단한것인지
침묵하는 일자진이 참 깊고 단단하다.
길에는 두터운 겨울 이불처럼 바람이 옹골차고
헐벗은 나무에는 신기루처럼 꽃망울이 영근다.
나도 꿈을 꿀 채비를 하여야하는가?
夢遊(몽유)의 바람은 문득 우주를 되새기고
나무가지는 세상을 略戌(약술)하며 고개를 끄득인다.
술에서 깨어나듯 내 아픔도 거진 다 가시었나보다.
믿음에 관한 저 유명한 게송이 화염경 정행품에 나온다
믿음은 도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
알체 선법을 증장시키고
의혹을 모두 없애
위없는 道를 열어보이네
믿음으로 온갖 집착을 떠나 보낸다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眞如다
진여라는 초월적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집착을 버리고 마음이 청정하면 이것이 곧 진여다.
눈물의 맑은 빛이 다 空인 줄을 알았더라면
내 삶은 덜 비극적이고 덜 기쁜것이 되었으리라.
세상은 어디나
커다란 공갈빵과 같은 가람,
그 공갈빵을 쪼개던
긴장된 순간 조차
내 몸은 덜 무거운것이 되었으리라...
바람에는 의미가 없다.
바람이 몰고 간 가을에도
바람의 묘지가 된 겨울에도
속이 투명한 물고기처럼
자성은 늘 비어있다.
바람은 그냥 바람이다.
잎새를 훑어내는 불손함도
마른 잎을 흔들어 깨우는 자비도
다 바람의 마음은 아니다.
세상을 더립힌 발자국
그 짓무런 상처 위에
바람이 불어오고 간다.
내가 아직 바람을 감당할 눈조차 떠지 못한 사이
벌써 겨울이 끝날 모양이다
허술한 탑신의 목들미에도 은여우의 겨울털같은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위대한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의 자서전을 읽다가
암보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것 사이의 차이를 이해한적이 있다.
악보를 보고 있으면 훨씬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게되고 더욱 연주에 집중하게 된다고 한다.
천하의 천재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리히테르의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어떻게 연주해야되는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것이 눈 앞에 있으면
씌여진대로 정확하게 연주하면 그만이다.
작곡가의 뜻이기도 하니까.
현란한 몸짓이나 에드립.
불경을 해설한 무수한 조사들의 주석도
결국은 에드립일지도 모른다.
경은 담백하다
마크 루스코의 그림처럼
그림도 사진도 담백한것의 생명이 더 길다.
한줄의 경구를 들고 하루를 보내는 재미는 또 얼마나 솔솔한가!
아니 더 오랜 시간,영원이어도 상관없다.
佛祖出世 無風起浪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나와
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어켰다
선가귀감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도 조사도 에드립일까?
부처 조사 없이도 세상은 여여한데.
수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미묘한 차이를 벌여가는 고음악처럼
같은 경을 계속 읽다보면
계속 읽는 구절 가운데 문득 미묘한 균열 혹은 이해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해석인지 깨닫음인지 홀로 경을 읽고 있는 나는 모른다
죄무자성 종심기
천수경의 한구절이 오늘 새벽잠을 깨운다
얼마나 멋진 글인가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죄가 아닌 단어
예큰데 사랑이며 희망이며,성공이며,이별이니 하는
어떤 단어를 죄와 치환하여 배치한다하여도
하나도 어색함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의 명문 속에서 견고한 진리가 옅보인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무심한 풍경일수록
일상에 빛나는 눈부신 에스프리가 담겨있는 수가 많다
시간은 한량없이 빠르게 흘러가지만
관조의 세상은 오직 한 정지 화면일 뿐이다
비로자나불의 그림자다.
우주가 얼마난 막연한 공간인지를
실감할 수 없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이곳이 바로 우주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주의 막막함이 주는 슬픔을 공감하기 위해
우리는 우주를 표류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우리가 문득 외롭거나 남모를 슬픔에 빠져들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심우주를 표류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엄경에서는 이것이 다 비로자나불의 대삼매에 비친 그림자라고 설한다.
우리의 일상사가 곧 비로자나불의 그림자요 환영이라면
인연이며 업장은 또 왜 필요했을까?
어짜피 다 노사나불의 헛기침인데.
백파논쟁의 이해
- 펌 -
불교는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여러 가지 대내외적 모순을 감당하지 못한 것과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조 사대부들의 편견에 의해 배척당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천여 년을 이 땅의 주된 사상 체계로 이어온 전통이 한편으로 긍정적인 측면도 남겼지만,
물이 오래되면 썩듯이 자기 발전을 모색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가지고 있는 자생적이고 원융과 조화를 꾀하는 정신사는 그렇게 쉽게 끊길 연약한 체질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재난에 당면해서 누구보다 먼저 이 땅의 수호를 위해 승병(僧兵)을 조직해 적들과 대항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워낙 철저하게 가해진 불교계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과 외면은
결국 불교를 중추적인 사상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그런 가운데 불교는 나름대로 자구책을 모색하는 과정을 거쳐 활로를 열기에 이르렀다.
유불(儒佛)사상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서 새로운 정기를 불어넣고자 하였고,
유학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유지해 사상사적인 위치를 확보하고자 노력한 것이 그 일면이다.
이런 가운데 조선조 사회는 차츰 자기 한계에 봉착하게 되며, 그 대안으로 조선조 후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實學)이다.
실학은 물론 유가계 사대부들의 전유물이긴 했지만, 이는 표피적인 관찰일 뿐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불교계 인사들의 직.간접적인 영향 또한 간과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런 인사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 자리에서 논할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영조 43~1852/철종 3) 스님과
의 19년 후배인 초의 의순(艸衣意恂, 1786/정조 10~1866/고종 3) 스님이다.
이들은 유교 국가인 조선 사회에서 점차 그 의미가 쇠퇴해 가던 불교의 위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불교인이 취해야 할 사명과 자세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노력의 한 모습이 삼종선(三種禪)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전개된 논쟁이다.
조선조의 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대전제를 완전하게 이뤄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요소를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정체성(正體性)에 대한 인식과 지표의 설정이 분명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민중불교 운동은 약화되고 산중불교화되는 측면이 없지 않았으며
진정한 구도의 자세보다는 기복 신앙의 한 방편으로의 자기 위상에 안주한 측면도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대부 문인들과 격외한담(格外閑談)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한 결과 진정한 구도자로서 자리매김되기 보다는
시우(詩友)나 탈속한 정인(情人)으로 스스로를 격하시켰다.
그리고 고행을 통한 정진 끝에 오도의 희열을 만끽하기 보다는
민중들이 제공하는 시혜를 득도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안이한 자세 또한 내적인 모순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 불교는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한번 불퇴전의 전환을 꾀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곧 나는 무엇인가, 부처는 무엇인가, 참다운 종교인의 자세는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자기 성찰이었다.
때마침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불어닥친 실학의 대흐름은 이러한 불교의 자기 성찰에 큰 힘과 파문을 던진 일대 사건이었다.
부패하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선악을 구별하지 않던 소승적 유교 사대부들의 고식적 태도에 일침을 가한 실학의 도도한 흐름은
동시에 불교계의 자기 비판에도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그런 사상사적 조류에 발맞추어 전개된 논쟁이
바로 묵암 최눌(?庵最訥, 1714~1790)과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 사이에서 오고간 심성(心性)에 관한 논쟁이고,
또 하나가 백파 스님과 초의 스님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이루어진 삼종선 논쟁이었던 것이다.
이 두 논쟁은 안이하게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불가(佛家)의 강력한 자기 반성이었으며,
변화하는 시대에 국면한 불교가 새로운 정신 체계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빚어낸 현실 인식의 결실이었다.
이같은 자기 반성과 진로 모색이 있었기에 개화기라는 극변의 시기에
그 뿌리가 흔들리지 않고 빛나는 전통을 지키는 대응력을 견고하게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문수경》은 백파 스님의 나이 60세 되던 1826년에 쓰여졌다.
그에게는 많은 저술이 있지만, 특히 이 책은 나름대로 선종의 계보와 선수행에 있어서 참된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는 임제종의 종조인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선수행을 닦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동일한 수행을 한다고 해도 도달하는 종착점은 다르다고 보았다.
즉 자신의 수행 능력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염두에 둔 수행만이 진정한 선열(禪悅)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사람의 근기 자체에 차별이 있다고 결론 지은 결과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가 이같이 근기에 따라 수행과정과 그 결과를 분류한 목적은
람마다 가지고 있는 선 수행의 특성을 분명히 인식해서 한계를 극복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이처럼 《선문수경》에 담긴 내용을 요약한 이유는
백파 스님이 주장하는 삼종선의 구분이 단지 인간의 근기를 차별화함으로써 인간 자체를 차별화했다는 오해를 조금이라도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즉 원래 백파 스님의 의도는 선을 세 가지로 분별해 선이 지닌 청정성을 훼손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선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함으로 해서 그간에 흐트러져 있었던 선가의 종지를 바로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그는 선종의 중요한 이론을 모두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설명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백파 스님의 삼종선 논의에 대해 초의 스님은
"옛날에는 다만 격외, 의리라는 말만 있었지 격외선, 의리선이라는 말은 없었다."고 하면서 백파 스님의 논리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초의 스님의 반박은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려는 선승답지 못한 발상임에 분명하다
근본이 무너지면 어떤 보완이나 대체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차츰 청나라와 서구로부터 심심찮게 들려오는 외국 문물의 침습에 대해
나름대로 의견을 바로 세우고 내적으로 와해되기 쉬운 선가(禪家), 넓게는 불교 자체의 유신을 위해 그가 던진 화두가 바로 《선문수경》,
말 뜻 그대로 선종의 문하에서 항상 손에 잡고 보아야 할 거울로써 제시하기 위해 그는 이 책을 지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하간 그가 《선문수경》을 내놓자 의도했던 것이건 아니건 간에 그 반향은 대단했다.
대흥사의 초의 스님은 곧바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써서 반박에 나섰고,
송광사의 우담 홍기(優曇洪基, 1822~1881) 스님 역시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1876)을 지어 반론을 제기하였다.
한편 김정희와 같은 사대부 유학자도 <증답백파서(贈答白坡書)>를 보내 그의 지나친 견해에 대해 우려를 표명할 정도였다.
물론 백파 스님의 입장을 옹호하는 주장 역시 뒤를 이었다.
백파 스님의 제자인 설두 유형(雪顔有炯, 1824~1887) 스님은 《선원소류(禪源써流)》를 써서 스승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표방하였다.
그러자 축원 진하(竺源震河, 1861~1926)가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써서 백파 스님과 설두를 한꺼번에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부터 1세기 가까이 백파 스님의 《선문수경》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백파율사비
추사가 초의를 거들어 논쟁에 참여하게된것은
차를 통해 당대를 풍미했던 두 분의 우정이 작용했으리라.
백파율사비에대한 긴 해설사의 설명이 끝나자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가짜같지?'
일반인이 봐도 진품같아 보이지 않았다.
사실 모조품이다.
진품은 성보 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가짜라고해서 추사의 筆活이 무뎌진것도 아닐터이니
이런 귀한 글을 여기서 보게된것만으로도 어디인가.
그런데 글을 자세히 보면 우측 7줄의 글체와 마지막 줄의 글씨체는
뭔가 다른 면이 있다.
추사의 글씨가 대체로 분방하면서도 글 간격이 좁아졌다 넓어졌다하며
활달하고 변화무쌍한데 비해
마지막 줄은 뭔가를 베껴 쓴것처럼 자간이 지나치게 답답해 보인다.
不자나 可자의 가로획도 추사의 글에서 보이는 날렵함이 없이
두터워 보이는것도 사실이다.
전문가들의 지적을 염두에 두고 글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숭정기원후사무오오월일입 이나
완당학사 김정희의 글씨체도 추사가 쓴 글씨가 아님이 역력하다.
모래 사장을 거꾸로 걷다보면
자기 자신은 나름 똑 바로 걸었는데도
지나 온 발자국이 비뚤비뚤 그려져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걸어 온 길은 사실 앞만 보고 걸어 온 길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 전후 좌우 잘 살피며 걸어 온 결과입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내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한 일만 줄곧 하면서 살아 온것 같은데도
주위를 둘러보면 마음 내려 놓을 친구 하나 없습니다.
참 세상을 헛살았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건실한 산행 도반이 곁에 있다는것만으로 많은 위안이 됩니다.
산길을 걸을 때도 길눈 좋은 도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길로 들어가는 소위 알바라는것을 안하게 됩니다.
시시 때때로 돌아보며 성찰하기.
산다는것과 성찰한다는것은 오직 한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마음이 과거에 머무르면 착이요
미래에 머물면 환입니다.
현재의 성찰이야말로 바른 삶의 길잡이입니다.
지장보살 앞에
아무리 비목처럼 서 있다하여도
나는 이미 살아있는 자의 편
비로소 세상이 쪼개어 진다.
깨어진 유리알처럼 구질한 삶
가래처럼 눌러붙은
욕심들을 헛기침으로 떼어내며 기도한다.
기도를 놓쳐버린다.
기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삶의 전면에서 삶의 뒤란으로 옮겨 앉는 동안
주검의 빛은 흐려지고
살사람은 살아야한다는 자기 위안으로 돌아가
또 밥을 먹고 고기를 먹는다
산자들이 어깨를 부축하고
이 빠진 그릇을 돌려가는 동안
나는 또 차례의 주검이 되어갈것이다
삶과 죽음이 편을 갈라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죽음을 위무하며 내 놓을 삶따위는 애초에 없는 거였다
그게 다 그거였다.
수행의 요체는
다만 범부의 알음알이를 없앨 뿐
따로 성인의 깨닫음이란것은 없다.
뭍과 바다의 변연에 서자 문득
선가귀감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범부의 지혜와 성인의 깨닫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병을 알아도 쓸 약이 없는것처럼
마음이 답답합니다
범부의 알음알이는 성인의 변견이요
성인의 깨닫음은 범부의 변견일까요
하오의 눈부신 사장을 바라보며
범부의 공도
성인의 공도
모조기 시원하게 날려버립니다.
내소사 입구에 업장참회기도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기도로 업장이 없어진다면
그걸 업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옆에 있는 우리 법사님깨 여쭈었다
법사님은 대답대신 미소를 보내 주셨다
원효대사는 금강 삼매론에서
참회란 업을 없애는것이 아니라
지난 업들이 현재의 내 행동에 작용하는것을 막는 것이라고 했다.
참 현실적인 법문이 아닌가!
업을 없에기 보다는 참회를 통해 업의 작용을 막아라,
즉 참회란 과거 업의 영향력을 차단하는것이란 말씀이다
세상사람들은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자기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참회야 말로 진정한 수행이요 보살행이다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세번)
천수경 참회진언 한 구절이 아쉽다.
생멸이 없음을 가르치는 산사에 와서
생사와 열반을 따지는 것은
저 노부부의 뒷모습처럼 허무할지도 모른다
성품에 생멸이없으니 생사와 열반도 모래 위의 신기루일 뿐이다
허공에 꽃이피면 생사요
꽃이 지면 열반이다
열반의 꽃
- 후 기 -
神光不昧萬古輝猷
入此門來莫存知解
서산대사님이 쓰신 선가귀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귀입니다
신광불매 만고휘유
입차문래 막존지해
어디서 많이 본 글이라 싶었는데
범어사 불이문 주련에도 동산스님의 멋진 필체로
이 문구가 씌여있었습니다
내소사 불이문에서
또 이글을 만났습니다
아는 글을 만나는것은 벗을 만나는것 만큼 즐겁습니다
내기 서 있는 이 곳은
부처님의 경계
광명이 넘실대는 곳입니다.
아는것도 없지만
알 수도 없는 세상
신광이 따사로운 세상 앞에서
나는 그냥 곁불이나 쬐다 갈 모양입니다.
Butterfly - Robin Spiel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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