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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부산시 의사회 화엄사 템플 스테이 2017.06.10일-11일

poll™ 2017. 6. 12. 12:16




구례 화엄사 템플 스테이






2017.06.12



부산시 불교 의사회






화엄의 문설주에 기대며








나라 동대사 기념품 가게에서




一切卽一 一卽一切

동대사 기념품 가게 앞을 지나다 문득

눈에 익은 글을 하나 만난다.

화엄과의 조우다.


일상에서 무등등으로,

무한의 과거에서 무한의 미래로,

시방의 끝없는 공간으로 뻗어가는

무량의 세계.

相入 相卽.


세상이 심화된다

심화된 세상의 확장된다










 철쭉이 만개한 한라산 선작지왓의 풍경을 담아보기 위해

8번이나 한라산 등반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至誠이 感天에 이르지 못함을 누구에게 탓하겠는가.

하지만 그 덕에 화엄사 템플스테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화엄사가 어떤 절인가!


화엄사야 지리산 자락에 앉은 덕분으로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이따금 찾게되지만

 언제부터인가 절은 설명할 수 없는 애절함으로

해질녁 바다처럼 화엄사를 그립게했다

특히 이무렵이 그렇다

코재 지나 집선대 지날 무렵

 "홀딱벗고,홀딱벗고" 유난히 울어대던 검은등뻐꾸기 소리.

그 때 그 새울음소리를 처음 가르쳐 주었던 친구는

이미 간결한 생을 마감했고

나는 산새 소리도 없는 산 쪽을 바라보며

홀딱벗고

홀딱벗고

뻐꾸기 울음소리를 되뇌어 본다









각황전의 구도는 섬세하다

섬세하다는것은 윤택하다는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잘 닦아 윤이 흐르는 법당마루는 유월의 나뭇잎처럼 빛났다.

섬세한것은 흐트러지기 직전의 꽃잎처럼 완벽하고 위태롭지만

세월의 고졸함을 그대로 드러낸 법당은

마치 그 섬세함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자의 위상을 보여 주는것 처럼 당당하기만 했다








四物치기를 경청하는 일행



새벽종 소리는 긴밤을 쫒아내고 잠을 물리치는 소리며

저녁종 소리는  미혹을 몰아내는 소리라고 한다

법고를 치는 현란한 동작에 빠져

일행들은 잠시 세상사를 내려 놓는다.










세상이 때로는 달아날만한 곳이라고는 없는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지남력을 상실한 허탈감이 임박한 죽음의 공포보다 더 삶에 부담이 될 때가 있다

먼 허공을 응시해도 그 곳이 허공이 아닐 때도 있다

망망한 대해에서 침몰하는 배에 갇힌것처럼

세상에 달아날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어쩌면 출생의 순간 우리는 영어의 몸이 되어버렸는

지도 모른다

각이 잡힌 신병들의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저 스님들은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될까


나는 왜 절로 왔을까

방황하는 나를 얽매기 위함인가

얽매인 나를 풀어주기 위함인가









친구들로부터 요즘 좀 우울하다거나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다는 말을 종종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말들의 본 뜻은 자신이 그만큼 섬세하다거나

바쁘다는것을 드러내는 말이지 결코 삶에 지쳐 풀이 죽어있다는 뜻은

대게 아니다

친구가 털어놓는 내면의 고민조차도 때로는 상대에게

자신의 우위를 드러내려는 內心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말과 행동에는 상대가 있고 목적이 숨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쉽게 말해 우리는 무의식 중에라도 늘 관객을 의식하며 말과 행동을 하는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부처님이면 어떨까

부처님을 앞에 두고 정좌한 스님들의 모습에서

"과연?"이라는 꼬리표가 떠오른다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거나 속일 필요도, 이유도 없어지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매일 일상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면면을 다 부처라 여기라는것은 불가의 가르침이다

또 그렇게 행하는것이 수행이 아닌가

부처님 전에 앉아 고요히 명상하며

필요는 사실이 아니라 다만 판단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내 아직 몸소 부처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人卽佛이 단지 판단이 아니라

 판단을 넘어 확고한 신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부사의법품


 

화엄경 불부사의법품에는 부처님의 열가지 머무름에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중에

"일체의 부처님은 모두 의지함이 없는 법에 머무른다"는 대목에

내 마음이 멈추어 선다.


머문다는것은 물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상태를 지속시켜 결코 후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부처님은 의지함이 없이 머문다고 하셨다

우리는 늘 어딘가에 의지하며 살아온다

하물며 사람 人자도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양을 나타내고 있지않은가

의지함이 없다는 말은 달리말해

自由라는 말과 같다

자유란 말은 오직 자신만을 따르겠다는 뜻이다

부처도,임제선사도,성철스님도 다 자유를 얻으신 분이다

解悟와 證悟의 차이

어려울것 같아도

오직 자신만을 따르되 티끌만한 의심이 없다면 證悟다

證悟는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

영원한 자유, 완전한 해탈이 증오다

성불이다.











행복이야말로 곧 화엄이라는 뜻은

세상의 존재가 그 존재만으로 벌써 충분히 아름답고 귀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고

자신의 향기와 모습의 고유함을 아낄 줄 알고

자신을 넘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는게

화엄입니다


행복이란 외래어가 주는 언어의 힘이 좀 아쉽기는 해도

이 경이로운 세상을 이어 줄 가장 마땅한 단어는

현실적으로 행복이 아닐까요.


화엄의 세계는 행복의 세계입니다

행복을 자각하는 세계입니다

무엇도 어느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세계입니다

바람같은 하늘같은 대자유의 세계입니다











악 중의 악


보현보살행품




화엄사 주지스님,풍채도 풍채지만 작은 눈에서 쏟아내는 미소가 일품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스님들의 화내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것 같습니다

오랜 수련을 통해 몸에 배게된것이 아닐까요

화가 없다는것도 어찌보면 수용입니다

세상을 다 이해하고 수용하면 번뇌 갈등이 생길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해와 수용의 세계가 화엄입니다

갈애가 없는 행복한 세상이 화엄의 세계입니다



화엄경 보현보살행품은 보현보살이 일체 보살에게 알리는 마중글로 시작됩니다

"불자들이여,만약 보살마하살이 한번이라도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악중에서 이 악보다 더한것이 없습니다"



성내는 마음을 한번이라도 일으키면 악의 근원이며 악중의 악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곧 백천가지 장애의 법문을 받게 된다는것입니다

법장은 '탐현기' 권16의 '전설결정비니경'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살은 차라리 백천가지 탐내는 마음을 일으킬지언정 한번이라도 성내지 말아야하네.

大悲에 어긋나는 해로운 일은 이보다 더한것이 없기 때문이네"


하루에도 몇번씩 발끈 화를 내는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뭐가 重한지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눈을 감고 귀를 연다

소리가 여명처럼 밝아 온다

물소리

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

논리를 잃은 감성들이

산마루에서 화염경을 읽는다



어스름의 긴 처마 그림자가

정토를 덮어가는 동안

코재를 지나 산길을 넘어왔을

오늘 하루치의 말들은

이미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기다림에 지친 나무들은

마침내 팔을 뻗어 허공에 조복하고

새들은 채워지지 않는 원망을 간직한 채

暗香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늙은 돌 계단에 핏줄같은 그림자가 선명하고

불이 꺼진 석등 위에는

노고단을 넘어 온 노란 달님이 걸려있다










일정을 마치고 경내를 소요하다

경비원에게 걸리고 말았다.

머리에 랜튼을 켜고 돌아다닌게 화근이었다

뜻밖에 경비원의 말씀이 온화했다

랜튼 불빛을 꺼 달라고 했다

우리 모습이 CC-TV에 나와 어지럽다는 거였다

조용히 발소리 죽여서 걸어 달라고 재차 당부 하셨다

참 합리적인 부탁이고 기분 좋은 꾸짖음이었다

세상 고요한 절간을 무법자처럼 설칠 일은 아니었다

자유는 스스로 절제 할 수 있는 범위에서의 자유이다

타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의 자유였다







자기 혼자의 선정은 아무리 이를 심화 시킨다하여도 결국은 오히려 자아 관념을

더 깊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요지부동의 관념의 실태를 잘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일순

더 큰 광명,큰 선정으로 옮겨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큰 광명이 곧 비로자나불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어렵다는것은 현실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로자나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라는 정체성의 문제를 떠나 

비로자나불의 엄청난 세계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갈피를 잡기조차 힘듭니다

마치 비오는 날 깊은 산 계곡물을 지나는 기분입니다









화엄경의 삼매는 삼매에 들면서도

비로자나불의 삼매에 의존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매를 통해 비로자나불의 대 삼매에 접속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삼매의 세계에 동화됩니다.


자신만의 선정이 아니라 우주의 선정으로 완성된다는것입니다

세계를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는 메카니즘이라고나 할까요








우선

비로자나불의 세계가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 세계라 생각해 봅니다.


그 세계가 분명해진다는것은 또한 法의 세계가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현실을 보는것이 아니라

지혜의 눈에 떠오르는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눈에 포착된 세계이며

부처의 힘이 미치는 역동의 세계입니다

그 활동에 원천적인 힘을 발하는 존재가 비로자나불이며

전 세계는 비로자나불에 의해 장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을 장엄하는 존재인 동시에

비로자나불에의해 장엄된 존재입니다















보살과 부처는 표리 일체라고 합니다

끝없이 全一한 우주 자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곧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려니와

그 비로자나불의 세계 속에서 부처의 뜻을 규명하고 실현하는 관점에서 보면

보살의 세계 즉 현실의 세계가 됩니다.


보살이 깨닫음에 눈떠가는 방향과 부처의 나라를 실현해 나가는

방향 또한 같습니다

이 과정에 자리행과 이타행이 있습니다

보살의 인생 행로를 나타내는 규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이 활동은 부처의 일방에서만 작용하는 힘,장엄,활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끝없는 업력과 과거에서 미래에 걸쳐

무한히 윤회하는  불가사의한 業力을 소재로 삼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의 활동은 결코 인간의 업력과 業海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업해야말로 부처님의 활동 장소이며

업력이야말로 활동 그 자체입니다.

보살의 한없는 진리 추구와 사회적 실천이

비로자나불 자체의 세계 광경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활동이 곧 화염경이 됩니다















화엄경을 논하기도 정의하기도 심지어 독경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포기한다는것도 쉽지 않습니다

화엄경 일독으로 화엄경을 다 깨우칠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읽기 전과 비교하면 달라진 무언가가 있겠지요.


화엄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 그 뜻에 통달했다하여도

그것은 마치 소경이 무지개 이야기를 듣고 무지개를 설명하는것.

解悟에 불과합니다.


비로자나불은 一切諸佛로 빛의 부처라는 뜻이려니와

먼 우주의 가운데에서 법의 불을 밝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一切卽一,바로 현실 세계로 눈을 돌리면

바로 나 자신의 중심에 비로자나불이 계시는것입니다

현실이요 현상입니다.

人卽佛의 부처님이 바로 비로자나불이 아닐까요.

내가 부처임을 모른다는것은

우리가 언제나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속고승전 권11 길장전



요컨대 죽음이란 삶에서 온다

제발 삶을 두려워하라

만일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태어남의 시작을 보고서 곧 죽음의 종말을 안다.

부디 삶을 참아야하며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것은

삶의 경외로움을 깨닫는 일이며

삶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죽음의 자각에 의해 참다운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어찌 하루 하루를 허투이 보낼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자각이 중요한 이유는 매일 매일 發心을 하게되는것입니다

발심의 중요성은 자신을 자각하는 일,

경은 이렇게 다시 초발심공덕품으로 이어집니다.











보왕여래성기품




부처님의 지혜 몸 속에 있네



이상하고 이상하구나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지혜가 몸 속에 있는데

어째서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가

나는 마땅히 저 중생들을 가르쳐 거룩한 도를 깨닫게 하고

모든 잘못된 견해와 망상의 속박에서

영원히 벗어나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가 그 몸 속에 있어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모두 깨닫게 하리라




























흑매가 남긴 매실


향기가 그윽하기 짝이 없다

매화꽃을 찧어 만든듯한 달콤하고 환한 풋과일의 향이

코끝에 날아든 나비처럼 살랑거린다











고요한 풍경은 고요 자체로 표현된 존재의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마음을 사로잡는것은

빛이라기보다도

그 빛이 증명는 영혼의 심도일것입니다.


비로자나의 광명은 우리 인간의 중심에서 영혼의 상태를 증명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자신의 영혼 사이에서

깊은 공감을 유도합니다.















"나는 당신이 이 사진을 찍었을 때의 특별한 감정 혹은 의미나

당신이 내가 알아주었어면 하는 쟁점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합니다

아마 영원히 그럴 가능성이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런 죄송스런 마음 때문에

열심히 사진 속에 드리워워진 당신의 무의식의 흔적 하나라도 찾으려 애쓰고자 합니다"











비내리는 산사의 아침보다 더 호젓한 기분을 주는것이 또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흘러간 음들은 그 순간에만 생생한 생명력을 갖는다

돌아오지 않을 오직 한 순간을 울린다

그리고 생성되는 순간 동시에 소멸된다"


비내리는 화엄사 경내를 바라보며

나는 기둥에 낙서를 쓰듯

소멸의 시간 위에 늙어가는 내 감성의 색을 덧칠하기에 바쁩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은 신산했고

영겁의 비구름을 둘러 쓴 산은 검은 기와 지붕의 언저리에서

해묵은 헛기침을 하듯 안개를 토해냅니다


비련을 더한 두 탑은 애정을 숨긴 연인처럼 낮게 속삭이고

타박상을 입은 혈관처럼 파리해진 돌계단에는

이 따금 새들이 날아듭니다


나는 어쩌면 당신이 좋아했을 잿빛 하늘을 가로지르다가

지금은 자유라 이름한 보제루 마루에 한껏 팔을 벌려 누워있습니다


과거는 기억의 현재이고

미래는 상상의 현재

모든 사고와 추억들이 今의 시간 아래 모여듭니다

今에 집중하고 今에 깨어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의 세상이

 인간의 형태를 지닌 하나의 침투할 수 없는 공간처럼 다가옵니다

그 세상을 향해 부딪치며 튀어오르고 산산히 부수어 지는 나를 상상해 봅니다

그러다 문득 相入 相卽이 되어

나는 거대한 해인의 바다 위에 그림자처럼 떠 있게 됩니다






















화엄사 최고의 미인 흑매의 모습입니다

붉다 못해 검붉은 색을 띄어 흑매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흑매가 피는 이른 봄이면

긴 겨울을 기다린 전국의 사진사들이 화엄사로 몰려듭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기 일 수 입니다.


검은 기와를 배경으로 한 그 자태는 정말 농염합니다.

이제 꽃은 사라지고 꽃이 진 자리에는

그윽한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청매실이 한창 이지만

밤새워 줄을 서 흑매를 담아간 포토죤은 봄가뭄에

개망초만 길게 웃자랐습니다.

황성 옛터에 들어 선 기분이었습니다만

그래도 흑매의 고고한 자태만은 변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구층암 가는 묵언의 길










깨어진 석탑이나 혹은 부재를 통해 느끼는

질박하고 소탈한 이미지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지금 까지 파괴된 문화재에 대해 상상해 온 가치나 이미지보다

훨씬 구체적입니다


이는 아마 인간이 사물을 시각을 통해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물을 통해 얻어지는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역으로 우리의 영혼 상태를 점검할 기회를 얻게되는것입니다


구층암의 저 반파된 탑은 세상의 가치에 침묵한듯 서있습니다

궁색을 숨기기는 커녕 지금의 존재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표정입니다

위선이 판 치는 세상을 향한 산중의 작은 외침처럼 자신 만만 합니다.

화엄성중입니다.








좋은 차



나는 커피는 좀 마실 줄 압니다

머리 속에 커피를 평가하는 개념들이 정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차에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행히 내 친구 중에는 차에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진 친구가 있는데

한번은 그 친구의 집에 초대받아

장장 6시간 동안 각종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눈적이 있어

차 종류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그 차가 가지는 특징에대해서는

어렴풋이 압니다.


좋은 차를 마시고 그 느낌을 말한다는것은

마치 백마가 꽃밭을 뛰어다니며 일으키는 향기를

그림으로 묘사하는것 만큼 어렵다

하지만 구층암에서 마신 차맛은 어려울것도 쉬울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차였습니다










떫은 맛 하나를 두고 차를 품평한다는것은 이상하다

그리고 그 떫은 맛을 나무가 받는 스트레스에 둔다는것은 더욱 권위적이다


왜냐하면 나무의 스트레스는 차를 마시는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나무를 재배하는 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차맛은 차를 덖고 유념하고 털고 건조하는 전 과정에의해 결정되려니와

차를 우려내는 자의 정교한 술기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할것이다

그러므로 떫은 맛 또한 나무를 심고 잎을 따

마침내 내 입으로 차가 들어오기까지 전체의 공정에 의해 결정되는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점은

맛을 지나치게 분별하여 좋고 나쁨을 따지는 마음보다는

혀끝으로부터 몸 깊숙히 파고들며 서서히 퍼져가는 차의 존재를 느끼며

차에 빗대어 그 속 어딘가에 있을 나 자신을 조금이나마 관조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명상을 통해 스스로 참회하는 시간을 가지는것이 좋습니다

참회는 내가 누구이며

내가 얼마만큼에 위치해 있는가를 인지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수행의 정도를 알게됩니다

자신을 온전히 아는것이 곧 참회요 해오입니다"



잔잔한 음성,큰 공명을 주는 말씀이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하나다


화엄경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찬찬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주옥같은 글들로 넘칩니다.

 유래림보살의 유심게가 그렇습니다

 이 대목만큼 그림이나 사진을 설명하기 좋은 글이 있을까요.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오음을 그려내나니

그러므로 세계 가운데 무엇이고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님도 그러하며

부처님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꼭 같아서 차별이 없네"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도

깨닫은 부처의 마음도

모두 다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나 마음이라는것은 공평한가

마음이 헤매면 중생이요,깨닫으면 곧 부처다







동국제일 선원 칠불사



지리산 묘봉 아래 해발 830m에 위치한 사찰로

삼국유사등에 따르면 101년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숙 범승 장보유옥 화상을 따라 이곳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

103년 8월 보름날밤에 동시에 성불을 한것을 기념해

수로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가야불교의 발상지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펌-


칠불사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 제일 손꼽는 것은 아자방이다. 1100여 년 전에 신라 효공왕 당시(지마왕 때라는 설도 있다) 금관가야에서 온 구들도사로 명성이 높았던 담공 스님께서 이곳에 이중온돌방을 축조했는데 내부 구조가 버금 아(亞) 자 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아자방이고, 옆에 있는 굴뚝을 입 구(口) 자로 보면 벙어리 아(啞)자가 되는데, 이곳은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는 침묵의 방 수행처로 만들어졌다. 이곳은 한 달 반을 그 온기가 지속됐다 하여 신비한 방으로 널리 당나라까지 알려져 있었고, 그 온돌의 특이성으로 세계 건축사전에도 등재돼 있다.

이 아자방에서 수도를 통해 득도한 고승은 수없이 많다. 서산대사는 수도를 한 후 아자방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다.

칠불사는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아자방을 국가문화재로 승격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쌍계총림 말사인 칠불사는 문수(文殊)보살 도량으로 애써서 공부나 기도를 하면 문수보살이 그 사람을 도와 일체 소원을 성취했다는 일들이 많다. 양택으로는 북쪽으로 금강산 마하연, 남쪽으로는 지리산 칠불암이 최고라고 한다. 도선국사의 옥룡자비결에 보면 칠불암터를 백자천손하는 터이고, 부귀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석숭을 능가하는 길지라 하는데 앞으로 무수한 도인과 대재벌을 여럿 배출할 거라 알려져 있다.

칠불사는 초의선사의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한 다도(茶道)의 중흥지이다. 이곳 화개동은 온 산야 전체가 작설차 밭이다. 다도를 중흥시킨 조선 말엽의 초의선사가 이곳 칠불사에 와서 참선하는 여가에 청나라 때 저술된, 요즘 같으면 백과사전에 가까운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부분적으로 다신전을 초록해서 그것을 기초로 동다송을 지었다.

운상선원도 빼놓을 수 없다. 골짜기에 운무가 펼쳐질 때 이곳은 구름 위에 있다고 해서 운상선원이다. 칠왕자가 공부했던 곳이며 수많은 고승들이 득도를 했다.






넘어야할 이유가 없는 문턱을 절대 넘는 법이 없으며

일단 넘어선 문턱에선 뒤를 돌아보지 않는자를 일러 문턱주의자라고 한다.


칠불사 긴 계단을 오르며 나는 마치 넘어야할 이유가 없는 문턱을 넘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화엄사라는 만찬을 즐긴 뒤의 후식같은 기분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넘어선 문턱 뒤의 세상 또한 그러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일까

보아야할것이 가려진 탓일까

일행은 구름없는  유월의 뜨거운 하늘을  피하듯

칠불사를 총총히 내려왔다








우정이란 이름의 일박이일









- 후 기 -



마음을 허물고

대문을 걷어냈다


내것이라 생각한것을 허물고 나니

세상이 비로소 다 내것이 되었다


새가 날아들고

바람이 또 드나들었다








                                                                           

                                                                                    The Softball Game - Robin Spielbe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