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을 떠나는 버스 앞에서 누군가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하고 덕담을 나누듯 인사를 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정말 산행하기 딱 좋은 날씨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실제 나쁜 날씨란 없다.
날씨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전한다.
비가오면 오는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모르겠다.지난 일년을 돌이켜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산도 마찬가지이다.
세월은 새로운것을 얻는 대신 지금껏 당연히 해왔던 일들을 서서히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세월은 내 두다리의 힘을 앗아 가 버렸지만
나는 마치 각오라도 한듯 오기로 산에 올랐습니다.
세월보다 더 무서운것이 후회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년의 세월을 돌이켜 봅니다.
참으로 많은 산을 힘들게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산행의 시간들 중에 내가 온전히 건져 올릴 수 있는 시간의 분량은
얼마나 될까요?
1시간,30분, 아니 어쩌면 5분의 시간도 안될 수 있습니다.
기억이란 그만큼 허무한 것입니다.
눈이 나쁘니 산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보통 힘들지 않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자동화된 최근의 사진기가 없었다면
나는 사진 찍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산에 올라 산을 담아 올 수 있다는 일은 일종의 과학의 승리입니다.
산에 오르고 또 찍어 온 사진을 바라보며 산행을 통해 얻은 이런 저런 기분과 지식들을
새로이 반추해 내는 것은 창작이요,산행과는 다른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산행이 체육이라면 후기는 문학에 속하는 분야입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산행은 '느낌을 담아 오는 일'이라고.
나는 묻습니다.
'무슨 느낌을 담고 왔느냐'고.
사실 이것은 굉장히 난처한 질문입니다.
설사 그 분이 산행을 통해 한 두가지의 기분이나 느낌을 담고 왔다 하더라도
그 매번의 기분을 일일이 달리 말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가슴에 묻어둔 느낌은
마침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그것이 그것 같은 중성적 감정이 되고 말것입니다.
중성적 감정이란 특징이 없는 감정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나는 그런 기분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산행을 통해 좋은 기분을 느끼는것은
어미의 가슴을 찾을 때의 기분과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대지를 어미의 품과 같다고 한다던지
마음의 고향이라고 표현하는것은
산을 통해 우리가 향유하는 묘한 항상성,불변하는 상주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는 다거나
미술을 감상하기 위해 미술관을 찾듯이
산을 사랑하는 자는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면서 라도
산을 통해 마침내 모성의 위안을 찾게됩니다.
여기에 무슨 감상이며 지식이 필요하겠습니까.
용 담
산행을 통해 얻는 또 하나의 것은 자기 실현입니다.
자기 실현을 얻기 위해 산을 오르는 자에게는
산은 극기를 위한 운동장과 같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극한으로 몰아넣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산행을 통해 자아를 극복하고
그 속에서 새로와지고 강해는 자신을 찾습니다.
허나 이러한 행위 속에는 묘한 탐닉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더 빨리, 더 길게,더 강하게와 같은
회를 거듭할 수록 강화되는
자기 극복의 시나리오를 통해 마침내
쓰러지고 지친 초췌한 영혼을 마주하게 되는것입니다.
산을 구비돌아 나는 원점으로 회귀합니다.
세상이 그기가 그기인것 처럼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허무는 과대망상을 통해 잃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허무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거대한 사막 속에서 아무리 맴돌아도
조그만한 원주 하나 벗어 나지 못한다는 우주에 대한 현실감입니다.
이러한 허무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점에서
고독과도 같습니다.
산을 오르는 일은 나에게 더할나위 없이 외로움을 즐길 기회입니다.
누군가 외로움은 주어지는 것이요 고독은 선택하는것이라 하였습니다.
산길을 홀로 걸으며 나는 차츰 견고해지는 내 의지를 느낍니다.
외로움이란 그 속성을 통해 더 견고해지고 더 독립적인
인간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됩니다.
그러나 한편 이 외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게되면
융통성없고 성질머리 사나운 외톨박이가 되기 십상입니다.
이것은 곧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1000m 고도에 가까와 지자 가까스로 가을을 찾을수 있었습니다.
단풍은 늙은 창부의 연지처럼 건조한 입술 위를 떠다닙니다.
선운사에 동백을 보러갔다가 막걸릿집 여자의
쉰 육자배기 소리만 듣고 왔다던 서정주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문득 낯선 길에서 길 잃은 사람처럼 멈춥니다.
왠지 나만 모른채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45명이나 되는 인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긴 계단 끝에 세상의 결말이 기다리는것 같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숨을 가다듬으며 소요하듯 길을 걷습니다.
산아래 충주호는 꿈결처럼 눈부십니다.
속세에 두고 온 온갖 상념들이 반짝이는 빛처럼
부질없이 느껴집니다.
마치 내가 두터운 산을 겹쳐 입은듯 하나가 된 느낌을 받습니다.
무상 무념.
참 신비로운 경지입니다.
나의 호흡이 산의 호흡입니다.
나의 한 부분이 땀처럼 흘러 나 자신을 떨구어냅니다.
자신을 버려 자신으로 회귀하는
이 자유로운 윤회의 사이클 속에서
우리는 새로와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 멀리 단양 땅이 보인다.
저 길 돌아 북으로 가면 적성산.
먼 삼국의 역사가 요동쳤던 고을.
지금은 무슨 일로 깍여지고 베여지는지.
세월의 무상함이 박무처럼 나직하게 다가온다.
설산에는 길이없다고 합니다.
오직 자신이 나아가는 곳이 길의 지향점입니다.
그래서 설산에서의 길은 나아가는 자의 등 뒤로
나아가게 되는것입니다.
오직 마음으로만 열리는 길.
내 마음에 또한 길이 있습니다.
마음의 길들은 나를 빠져나와 내 등 뒤로 사라집니다.
마음이 나를 밀어 길 위를 나아가게 합니다.
사위 질빵
세상에는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과,할 수는 있지만 하고 싶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산행을 통해 나는 이 대립하는 양가의 가치를 동시에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내가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산과
갈 수는 있지만 가고 싶지 않은 산이 그 경우입니다.
오르고 싶은 산을 오를 수 없을 때 나는 까끔 서글픔을 느낍니다만
그것은 내가 가지는 한계이므로 섭섭함은 그기서 끝납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도 얼마던지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오르고 싶은 산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를 수 있는 산 또한 너무도 많습니다.
그리고 좋은 벗 또한 많습니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하루가 몰래 끝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맞추어 하산 길을 재촉해 내려 왔건만
5분이 모자라 아쉬움이 하늘 끝에 대롱 대롱 매달립니다.
세상 모든 이치와 같이 빛은 모자라는 상태에서
더 아름다운 모양입니다.
가은산 뒤로 멀리 월악산 영봉을 힘껏 당겨 봅니다.
해질녁의 산그림자가 더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뽑냅니다.
한낮의 거친 빛과 싸워서 연전 연패를 하고 거둔 그림이기에
더 없이 사랑스럽습니다.
낮 동안 그 거칠게 뿜어내던 햇살들이
산들의 살 속으로 회귀 하는 순간
어둠은 어미처럼 아늑하게 다가 옵니다.
집으로 가야할 시간입니다.
산을 오르되 오르는것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집착이요 헛된 욕망입니다.
꿈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음력 14일의 달이 겸연쩍은듯 감나무 아래에 숨어있다.
차지않은 달인들 어떠랴.
컹 하고 내뱉는 월악의 묵은 기침에
금수산의 비단빛은 저만치 사라지고
청라로 몸을 감은 가은산의 낮은 능선이
오입질을 하다 들킨듯 얼른
긴 하루에 지친 산님 하나를 감싼다.
청풍호에도 곧 별들이 내려앉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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