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 아홉은
술로 처음 얼굴을 물들였을 때.
첫 여자를 만났을 때.
그 황혼같은 붉은 물에
나를 적셨을 때.
그 붉은 홍조 옅어져
옅어져
멀어지는 봄꽃을 좇아가다
얼룩진 유리알 하나를 숨긴다.
봄날은 간다.
매 발톱
술이 술잔을 떠나가듯
내 청춘도 내 손아귀를
힘없이 빠져나간다.
세상은 넓은 초록의 보자기를 펴
떨어지는 꽃들을 주어 담는다.
아! 그것들이 다 청춘이다
흘러간 청춘을 꿈이라 여기며 살아 온
내 가슴 언저리가
알싸해 온다.
꿈은 늘 위태로왔다.
위태로왔기에 꿈이라 여겼다.
꿈과 현실이
키메라와 같이 뒤섞여
위태로와 진 나이
청춘을 녹인 잉크로
문신을 새기듯
이겨온 삶
그 삶에
비로소
내가 진다.
멀리 가야산 바라 보며
산행도 산책도 아닌 기분으로
산을 오른다.
내 인생이란게 늘 이렇게 어줍잖다.
나는 결국 이런 어중간한 인생을 살다 말것같다.
춥지도 덥지도 않는 삶
배부르지도 허기지지도 않는 삶
간절하지도 애탈것도 없는 삶
재미는 없어도 나쁠것도 없는 삶.
봄날은 간다.
뜬금없이 왠 봄 타령인지.
가사도 제대로 모른는 이 백설희의 노래가
오늘따라 입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가사를 아무리 음미해도
성황당, 청노새 ,옷고름, 역마차...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고어가 된 단어 투성인데
도대체 이 노래의 매력은 어디에서 솟아나는걸까.
남산 제일봉의 토르군
알뜰한 맹세에도 봄은 가고 말것이며
실없는 기약에도 봄은 기어코 가는것이다.
봄
청춘이 없는 개인사가 어디있겠는가.
이 지나간 청춘의 허무함이
가슴 깊이 자고 있던 그리움을 자극하여
아련한 슬픔을 우려내는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영원한 중년의 황혼가이다.
치열했던 삶의 고백서요
고해성사이다.
우측에 우뚝 솟은 산이 가야산이다.
가야산 주능선에 두리봉이 보이고 좌측높은 봉이 깃대봉.
맨 앞쪽이 오봉산이고 그 뒤가 비봉산이다.
봄날을 이렇게 다 보내고서야
봄날이 가는 줄을 알았다.
감정의 사치일까
막장에 서 보지 않고서야
어찌 허무의 깊이를 알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나이 쉰을 넘겨보니
어짜피 인생이란것이 그리움이다.
체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봄날은 이렇게 담담한데
도대체 너무 담담한데
오늘은
그리움이란 말조차
천리 밖 물길처럼
아련하다.
봄날에 열광하지 마라
흘러가는 청춘을 탄식하지 마라
삶의 열정을,
삶의 정원을 가꾸어라.
인간을 에워싼
원숙한 사계의 정원을.
봄날 소묘
그 봄날에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웃마을에
구씨 성을 가진 영감이
붉은색 츄리닝 차림으로 논둑에 쭈구려 앉아 있었다.
청원리 필골에서 넘어 온
왠 미친 여자 하나가
금빛 보리밭을 지나 이쪽으로 느리게 건너 왔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녀를 노려 보는 영감의 눈은
어쩐지 장산곶 매처럼 날카로와 보이기도 하고
독오른 까치 살모사의 눈처럼 사나와 보이기도 한데
지금에야 생각해보니
미친 여자의 헝크러진 머리 위로 부는 바람이나
구씨 노인 초가 낀 결막염을 앓은 눈알이나
할일없이 흘려 보낸 그 시절 내 청춘이나
다 같은 한 때였단 말이지.
춘정이 뚝뚝 떨어지는
오입질이 급한
봄날 한 때 였단 말이지.
더 높이 올라 산들의 마루금을 좇아가보면
덕유산 향적봉과 육십령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보인다
바위 뒤로 비계산-마장재-우두산(의상봉)
앵초
사랑도 一物이거늘 어찌 무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랑도 변하는거니"
그래 봄날처럼 헤어지는거다.
그래야 봄인거야.
꽃도 질리나 봅니다.
저만치 가는 봄이 허무한걸 보니
쓸모도없이 고뇌의 골만 깊었습니다.
시간은 내 인생만큼 더디게 흘러
아!
이제 통증이 된 나이 앞으로
봄 실은 배를
저만치 띄어 보냅니다.
배가 지나간 봄의 뒤안으로
손바닥 가득 세월이 내려않고
봄은 결국
가라지 않아도
갑니다.
푸른 매화산을 뒤로
비계산-두무산-오도산
오도산과 비계산 사이로 희미한 지리산 천왕봉
유달리 산 마루금이 명료한 봄날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나는 이 노래가 주는 회상형의 종결어미들을 좋아한다.
memory
딱히 회상할 시간도 사건도 인물도 없는
시대의 사막같은 내 머리 속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나지막한 읊조림
누구의 인생인들 꽃같은 시절 없겠는가
꽃피는 시절의 이야기를
인생의 꽃이 지는 시기에
지는 꽃을 메타포로
노래 부를 때
이 아련함은 하나의 그리움 혹은 서글픔으로
비로소 내것이 된다.
애기 똥풀
줄기를 자르면 노란 애기똥과 같은 진액이 나온다.
- 후 기 -
꽃이 필 때 몸살을 앓듯
꽃이 질 때도 몸이 다 아프다.
떨림이 없다면 그게 어디 꽃이랴
한 시절 뜨겁게
바라 보았던 꽃
그 봄날에 열광할 필요는 없다.
흘러 나가는 세월
흘러 나가는 청춘
공평한 것이기에
더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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