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오래 전부터 밤바다에 외롭게 반짝이는 고깃배의 불빛을
그림으로던 사진으로던 아니면 다른 무엇이로던 꼭 한번 담아보고 싶었다.
고요한 밤바다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떠올리는듯
환상적이고도 몽환적인 아르페지오로 가득했다.
그것은 물결의 아라베스크였다.
그리고
저 불빛.
밤 바다는 자궁이요,나직한 태교다.
모든 움추림을 담아내고 또 키워낸다.
나는 불씨처럼 빛을 옯겨담는다.
여행지에서 홀로 밤을 지새운다는것은
일종의 격리입니다.
집에서도 가지지 못한 나만의 asylum에 갖혀
모처럼 세상에 대한 진지한 시간을 가져봅니다.
어둠 속에서 내가 세상으로 조금씩 확장됩니다.
그동안 귀기울이지 않았던것,
눈여겨 보지 않았던 세상과 사물에대해 깊은 애정이 생겨납니다.
밤하늘과 밤바다 위에서는 반딧불같은 작은 빛 하나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나는 빛을 모으고 또한 그 빛 하나 하나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온갖 상상과 관념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설정일 뿐.
나는 이 조그마한 불빛들이 내 가슴을 지나 타인의 가슴에도 타오르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므로 불빛은 사진 속에 고정되거나 갇혀버린 대상이 아니라
움직이는것,비로소 자유로와 진 이데아가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대상으로서의 사물로부터 느끼는 실존적 감각입니다.
구름위의 산책
나는 늘 제주의 만조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만조라는 단어 속에는 상처를 보듬는다던지
용서한다던지 혹은 만선의 풍요한 이미지가 늘 담겨져 있다.
인간사의 죽음마저 덮어버리는 거대한 역사성,
설명할수없는 함축성
결국 따라가야만 하는 운명같은 힘을 느낀다.
긴 밤을 겨우 넘기고
마치 커다란 컵에 넉넉히 담긴 커피를 마시는것 기분으로
만조의 아침을 맞는다.
서귀포의 일출
빈 의자에
아침 햇살이,
동지나해를 건너 온 해풍이,
잠을 설친이의 건조한 시선이,
아직 차지않은 9월이
앉아있다.
아름다움은
색체도
형태도
질감이나 세부 묘사도 없는 곳에서
문득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다.
잠시 죽어버릴것 같이
세상이 안녕을 고한다.
이별이란
잠시 죽음을 가슴으로 직감했을 때 비로소 이별이된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의 한쪽 끝에서
나는 조용한 물음으로 절망한다.
헤어짐의 이미지가 더 없이 명징하다.
바람도 물도 아직은 따뜻하다.
제주의 공기는 변덕스럽되
모나지가 않다.
나이를 먹다보니 이렇게 다소 바람 빠진듯한 장면에 마음을 놓는 일이 허다하다.
신선함도 감동도 없는
중성적인 기분.
있다고도 할수 없고
그렇다고 아주 없다고도 볼수 없는.
젊음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영원히 잃어버린것이 되었지만
마음 한켠 이렇게 서늘한 풍경으로 남아
때로는 마음 구석을 꽤 따뜻하게 쪼여 줄 때가 있다.
늦 여름이 남아 있는 한라산의 숲.
한라산의 생태계는 참 건강하다.
천이가 분명하고
나무들의 품이 넉넉하다.
이런 숲에서는 뭍에서 지니고 간 긴장이
마치 화기를 만난 버터처럼 허물 허물 녹아 버린다.
오백 나한
병풍바위와 오백나한
서귀포 쪽의 여러 오름
병풍 바위
곰취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주목의 고사목.
저 나무들은 지금 죽어가는 중인걸까
죽어가는 나무들의 품위가 당당하다.
천년간 죽음의 고독을 지키는 일.
나라면 싫다.
나는 죽어 바람처럼 사라져 버릴것이다.
윗세오름
퍼포먼스
구름이,하늘빛이 멋진 날
길가다 보리수 열매 한웅큼 얻어먹었다.
여기 말로는 보리수 열매를 볼레라고 하는 모양이다.
아직 열매에 붉은 빛이 덜 내려앉았다.
산중에서 열매를 얻어먹기는 처음이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재미가 이런거로구나.
입안에서 볼레의 연한 새콤한 맛이 돈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참 이채롭다.
산을 찍다말고 구름에 정신을 빼앗긴다.
사진속의 하늘의 분량이 많아진다.
산행이 갓 튀겨올린 야채 튀김을 먹듯 경쾌하다.
이래 저래 즐거운 산행이다.
산에서 내려가면 꼭 잘 튀겨진 야채 튀김을 먹어야겠다.
(결국 튀김 우동으로 대신했음)
선작 지왓의 지평에는 어김없이 거센 구름이 걸려있고
눈을 벗은 평원에는 키작은 조릿대가 열심으로 자라난다.
저 너른 들, 거센 조릿대를 다 키울 물이 여기저기서 흘러 넘쳐 고산 습지에는 풍요가 가득하다.
녹슨듯 비치는 옅은 갈색빛이
한라산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오고있음을 말해준다.
마치 벗겨진 머리처럼
주목과 구상나무들이 고원지대를 둘러싸고 있다.
주목에 달린 붉은 열매는 아래가 비어있는것이 마치 작은 홍등처럼 생겼다.
약간 달짝한 맛이 나는데
씨앗을 씹으면 동백씨 기름같은 냄새가 묻어난다.
붉은 열매를 손으로 누르면 알로에처럼 끈적거리는 액체가 나온다.
저 멀리 산 아래 구름과
산 위의 구름 모양이 다르다.
산아래의 구름 떼를 보니 여기가 높은 산임이 실감난다.
해발 1600m 부근.
내일은 비가 올것 같다.
권운
새털 구름이 고흐의 작품처럼 흐느적 거린다.
마음도 새털처럼 가볍다.
누가 저 구름을 두고 돌아서고 싶겠나.
샘터에서 목 한번 축이고는 하늘을 눈시리 도록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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