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점으로 가야할 버스가 눈에 길이 막혀
할수없이 영각사에서 하차해 산행을 하기로 했다.
영각사에서 남덕유산으로 오르는 길은
황점에서 오르는 길보다 훨씬 경사가 가파르다는 소리가 들린다.
등산 초반에 유달리 힘이 달리는 나로서는
별 반가운 소리가 아니다.
영각사에서 남덕유로 오르는 코스는 등반객들이 많아
자칫 철계단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등반을 포기해야할 정도로 악명 높은 코스라고 한다.
다행히 연일 계속된 서해안 폭설 뉴스 탓에
등반객들이 좀 줄었다고는 하나
등로는 마치 줄줄이 사탕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산을 오를수록 눈바람이 점차 거칠어지며
포근한 설경을 만들었다.
매서운 눈보라는 금새 산을 설산풍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은근히 눈이 걱정이 되었지만 주위에서 하도 기쁘들하니
내 걱정도 그들의 즐거움에 묻혀 어느결에 사라졌다.
세상은 온통 은회색으로 조망의 즐거움은 완전히 박탈당했다.
오직 눈만보며 걸어야하는 산.
외경이야 아쉽더라도
미니멀한 세상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완벽하다.
복잡한 세상이 싫어 산에 오르는 나는
설산이 주는 이런 미니멀리즘의 미학이 좋다.
단순화된 세상 속에
내 마음을 단순하게 배치시키는,
단색의 두가지 세상이 대비되는 즐거움.
오늘 내가 가지고 싶은 세상이다.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걷는것 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눈도 눈이 만든 세상을 구경할 때 즐거운것이지
눈의 세상 갇힌채
밑도 끝도 없이 길을 걷는다는것은
즐거움 이전의 고행이다.
그렇다고 이번 산행이 고행에 가까운 고통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길은 새롭고 즐거웠다.
끝없이 수직상승하는 철계단을 보니 묘한 호기심과 아울러 걱정이 배가된다.
도중에 멈추어 설수 없는 운명의 철계단.
여지껏 산을 오르느라 기운이 다 빠진것 같은데
저 계단을 어떻게 다시 오를지 마음이 벌써 불안하다.
사실 이것으로 계단이 다 끝나는것도 아닌데...
마지막 고비라 생각하고 다시 한번 기운을 정비한다.
어디 만만한 산이 있었던가.
지난날 힘들게 오른 산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힘은 들었지만 뒤 돌아보면
황홀한 상승이었다.
눈보라가 매섭게 불어왔다.
삼보 일배.
등에 지고 오르는 세상이 무척 거칠다.
거센 눈바람으로 사진을 찍을 수 조차없다.
카메라를 열면 금방 눈이 치고 들어와 렌즈에 얼룩을 만들었다.
얼른 사진을 찍고 외투를 열어 사진을 옷에 파묻었다.
그러나 외투안의 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땀으로 인해 습기 투성이었다.
사진기를 감쌌던 수건은 이미 동태처럼 얼어 꾸들거렸다.
산정에 올라서니 더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입김이 나오는곳은 곧 얼어붙기 시작했다.
모자에는 고드름이 달렸다.
눈에 들어온 눈으로 이따금 눈이 따끔거렸다.
두 볼은 금새 얼음처럼 차가와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괴로운것은 쉴새없이 흐르는 콧물이었다.
얼굴과 입을 가리면 콧물은 좀 덜해졌지만
곧 숨이 가빠왔다.
가리개로 입을 가렸다 벗었다 하는 사이에
가리개마져 물에 젖어버렸다.
물에 젖었다는것은 곧 언다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만 유별난것 같아보여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눈덮인 나뭇가지나 상고대는
지난해 실컷봐서 이미 별 신기한 면모는 아니라하더라도
냉정을 찾아 품평회를 할것 같으면
아무래도 눈덮힌 숲은 한라산이 제일이지 않나싶다.
나무 수종도 수종이려니와 나무와 눈이 만들어내는 단순하면서도 힘있는 모습은
성판악 숲이 제일 좋았던것 같다.
지리산의 눈덮인 모습도 장관이었다.
그러나 덕유산과 단순 비교가 안되는 까닭은
내가 본 지리산 설경은 맑은 하늘 아래 눈과 산이 이루는 절묘한 조화를 본것이고
지금의 나는 눈 속에 파묻힌 격이니
숲을 보되 세상을 볼 수 없는 꼴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해도
눈속에 갖혀 마치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며
존재의 산야를 헤매이는
내 자신이 스스로 대견스럽다.
눈속을 걷는 산님들의 모습에서
일종의 고달픔이 느껴진다.
죽을 정도의 고난은 아닐지라도
모종의 저항을 느끼고 있음은 분명하다.
산행을 통해 얻는 고통은 당연한것이다.
고통을 담보하지 않는 산행은 없다.
다만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가 관건이다.
인생이 다그런것 아닌가.
말이 없는 침묵의 산행.
묵언의 세상에서
말에대해 생각해본다.
언어로 체험하기 이전의 세상,예를 들면 옹아리를 하는 어린 아가였을 적에도
우리에게는 표현을 하고 싶은 말의 에너지가 있었다.
이런 말 이전의 표현하고싶은 에너지야 말로 순수한 우주의 에너지요, 마음의 에너지다.
우주의 마음이요
마음의 우주인것이다.
생각의 덩어리인것이다.
나는 설산을 걷는 내내
이 생각의 덩어리를 물에젖은 솜뭉치처럼 머리에 넣고 다닌다.
표현할수 없는 느낌의 세계와
표현 하는 순간 하나의 언어로 고착되어버리는 세계.
이 엄연한 두 세계의 시퍼른 날이 선 능선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닫혀버린 입속에서
거친 입김만이 언어처럼 터져나온다.
나는 어디로 가는것일까
서봉, 장수 덕유산으로 가는 길이 내가 나아가야할 길이건만
나는 애초 이길을 모른다.
아름알이로 찾아가야할 길이다.
나는 눈오는 산중에 놓여난 짐승처럼 겉도는 기분이다.
눈이 가득한 산분위기가 그렇다.
마주 오는 산님께 묻지않아도 될 외통의 길을 자꾸 물어본다.
눈길을 걷는 재미는 차치하고라도
추위를 가로막는 내 몸의 치장이 여간 거추장스럽지가 않다.
산모처럼 뱃속에 감싸고 있는 카메라로 인해
벌써 목언저리가 뻐근해 온다.
마음은 마치 핑갈의 동굴로 나아가는 범선처럼 가볍다.
산 구비를 돌때마다 연방 탄성이 튀어나온다.
고통을 보상받을만한 경치가 아닌가.
고생이 산행의 양념처럼 느껴질 즈음
산을 몇번 오르내리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서봉에 도착했다.
도중에 산행이 무리였는지 다리에 지가 내리는 사람이 속출했다.
경각심을 다시 가진다.
서봉지나 오면서 덕유산 종주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 옴을 느꼈다.
앤디로부터 몇번인가 종주에대해 권유받은 바 있지만
육십령에서 향적봉에 이르는 구간을 맑은 날 한번 원없이 걷고픈 생각이 들었다.
덕유산은 겨울산이라고 하지만
올라보니 역시 덕유는 겨울산에 이전에 큰산이라는 느낌부터 우선 받는다.
지금이야 눈앞의 경계도 불확실한 형편이지만
이렇게 베일에 가린 모습이니
산에대한 애정은 더 간절해진다.
발원이라는것이 이런 경지인가.
아무것도 없었던 마음에서 생각의 불씨가 살아나는것이 참 신비롭다.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그 불씨가 더 강해짐을 느낀다.
무엇을 등에 지고 걷는 것일까
무엇을 마음에
머리에 담고 걷는것일까.
스쳐 지나가는 산님의 얼굴 빛에 空이 가득하건만
정작 그는 그 空의 세계를 느끼실까.
노랑 초록 파랑의 원색이 없었다면
세상은 온통 무채색이라 여겨도 좋을것이다.
온통 백색의 세계라 할지라도
눈덩이와 눈덩이 사이에 경계 구분은 명확하다.
눈속 세상을 대하는 마음 또한 한결같아보여도
천사람이 천사람의 감흥을 만들고 있을터이다.
명료함과 명징함은 이런 풍경을 두고 말하는것인지.
바위를 덮은 눈의 모습이 더 없이 깨끗하다.
아! 하고 외치며 또 한컷.
아가의 주먹손 같은 눈꽃.
이런 몹쓸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끼기에 족한 풍경이다.
탈레반
털모자가 얼어 헬멧을 쓴 기분이다.
아가처럼 순박한 웃음을 짓는 니나님
부처님의 미소.
회색빛 하늘 저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산등성이
나는 또 그 산등성이를 좇아 나아갑니다.
마치 옛것의 향수에 취해 엔틱을 기호하는 사람들처럼
나는 아득한것에 묘한 마음을 둡니다.
회색빛은 저 먼 옛날의 색처럼 느껴집니다.
하산길이 무어라 표현 할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산을 내려다 본다.
회백으로 마름하는 눈의 세상이 이상향처럼 아득하다.
나는 무언가 눈물 썪인 고백을 해 보고 싶기도하고
'할'하고 의미없이 고함을 지르고도 싶었다.
세상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제한된 세상의 깊이가 이렇게 나를 안절부절하게 할 줄이야.
눈 내리는 산야에서 착 가라앉는 침잠함을 느끼고 싶었건만
마음은 오히려 들뜨고 생각은 먼 곳에서 맴들고만 있다.
느낌을 정리하는 일이 부질없는 짓이라는것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느낌이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초라해질것이라는 생각도 가져 봅니다.
풍경에 생각이 스캐닝을 하듯 지나갑니다.
가슴에 쓰윽하고 느낌이 새겨집니다.
마치 고요한 연못에 파문이 일듯
가슴에 물결이 일었다 닫힙니다.
곧 부질없는 짓임을 압니다.
세상은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내가 생각으로는 차마 덧칠할 수 없는...
하산길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로했다.
눈으로 느끼는 세상은 너무도 신비로우니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 걸기로했다.
마음을 아무리 닫아도
세상을 보고싶은 마음이 자꾸 새어나와
나는 사진기를 또 꺼낸다.
목덜미에 통증이 밀려온다.
이지경이되어서는 안된다.
내 몸도 몸이려니와 물에 젖은 카메라에게도 못할 짓이다.
하산길이 이렇게 길다는것은 덕유산이 큰산이란 증거이다.
역시 큰산이야를 반복하며 산을 내려가다
더 이상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베낭에 집어넣어 버렸다.
마음의 눈을 강제한 것이다.
하산에 일념하여 산을 내려가야겠다.
길고 긴 산길이 이어졌다.
그래도 발아래가 편해지니 오늘 산행에 대한 행복감이 오롯이 솟아났다.
즐거운 산행이었다.
더 이상은 말을 줄여 마음에 새겨야겠다.
말하지 않는 세계가 더 큰 법이니까.
-후 기-
누가 물었다.
오늘 산행 어땠냐고
물어나 마나한 질문이지만
나는 오기있게
별로였다고 대답했다.
의외라는듯이
왜 냐고 되물었다.
"눈만 보고 산을 보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산행이라 볼수 없죠."
알듯 모를듯 그 사람은 내 대답을 일리있다고 인정해 주었다.
덕유산은 겨울 산이란다.
겨울산에 올라 겨울을 제대로 맞았으면 그만이지
가타부타 무슨 연유가 더 필요하랴.
덕유산은 이미 내 가슴에 꽉 차버린것을.
River of Dreams/Hayley Dee Westenra
(비발디 4계 겨울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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