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통해 월출산을 몇번이나 오르게 될까.
거대한 덩어리 속 미로를 헤쳐나와
마치 얼른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애써 되새기듯
지나 온 길을 되짚어본다.
여섯시간 이십분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산행.
만약 이 길을 또 다시 걷게된다면
그때는 분명 다시 찾은 이유를 알게 되리라.
산행 머리에서부터 벌써 힘이 빠진다.
이런 경우 지난 경험은 오히려 악재이다.
앞으로 전개될 극단적인 상승과 하강 곡선을 떠올리며
힘의 안배에 들어간다.
평균적인 힘은 이럴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머리 위에 아스라히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이 걸려 있다.
처음 월출산에 올라 지리한 행열 끝에서
무작정 바라보아야 했던 이 암벽은
예나 지금이나 골치 아픈 숙제처럼
떡하니 내 앞에 버티고 있다.
아무리 카메라 셔트를 눌러봐야 이 시원한 정경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재주로는 무리다.
매일 먹는 흰 쌀밥도 맛이 다 제각각이듯
이 막연한 바위의 배치 속에도 필경 어딘가에 아름다움의 핵심이 비장되어있으련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마치 에둘러 하는 말처럼 풍경은 답답하기만하다.
인공의 구조물이 자연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 구조물을 바라보는 특별한 포인트가 필요하다.
마치 사진기에서 두개의 포커스가 딱 맞추어졌을 때
가장 선예한 상이 맺히는것처럼
그 구조물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분명히 있는것이다.
그러나 나는 소위 사진이 잘 나오는 "정치적" 위치를 별 좋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산에서 만나는 "우발적" 풍경이 더 마음에 끌린다.
인적이 끊어진 붉은 다리를 보며
일요일 월출산에 이런 일이 다 일어나구나하는 별난 생각을 해본다.
천황봉의 위용
세상의 모든 길은 마침내 어디선가 끝이 나겠지만
걸음을 끝내는것은 순전히 나그네의 의지이다.
그래서 길은 궁극적으로 희망이다.
희망이 주마등처럼 사라진 자리에서
또 다시 새로운 희망을 안고 길을 걷게된다.
저 멀리 겟세마네의 기도처럼
암울한 경사의 길이 걸려있다.
통천문
공룡의 비늘같은 날카로운 암릉이
강진벌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간다.
월출산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망을 소개하자면
1.천황봉에서 강진 벌로 뻗어나가는 힘찬 암릉
2.바람재 지나가는 서정적 오솔길
3.구정봉에서 바라보는 천황봉의 전체조망
그냥 내 생각이다.
모름지기 이런 여유를 누릴 수 있어야 자연인이다.
경쾌한 행진
차오른다는 기분은 이런 기분이다
푸른 물결이 기세좋게 올라와
목언저리까지 꽉 차오른다.
오월은 이렇게 풍요하다.
풍요하기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애잔함은 없을지 모르겠다.
녹음에 온통 갇힌 산
통일된 빛의 일체감
턱 하고 숨이 막힌다.
저 푸른 숲을 향해 몸을 날린다하여도 왠지 온전하리란 착각이 든다.
붉은 병꽃 너머로 우리가 가야할 주 능선이 보인다
월출산을 대표하는 두 봉우리 사이를
능선길이 견고하게 견디고 있다.
소박한 길이다.
소박하기에 서정적이다.
골치 아픈 기기묘묘를 빠져나온
한줄기 외로운 길.
내가 바람재 가는길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이 산을 오른다 하여도 마찬가지리라.
죠지 거쉰의 섬머타임을
어떤이는 Living is easy라 노래하였지만
어떤이는 Living ain't easy라 하였고
또 어떤이는 Life is not so easy 라 노래하였다.
이렇게 같은 노래를 불렀지만
어떤 이에게는 인생은 쉬운것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인생이란 결코 녹록한것이 아니었다.
인생이 이렇듯, 월출산을 걷는것도 마찬가지다.
깔딱고개의 모진맛을 경험하지 않고서야
어찌 겸손한 산행의 페이소스를 이해하랴.
나는 월출산의 이 호젓한 소로가 끔찍이 마음에 든다.
숨겨둔 정부와 길을 걸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사랑에 감싸진 기분
오감으로 다가오는 엑스터시
걷는것도,걸으며 보는것도 즐거운
사랑스런 길이다.
낯선 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안다.
모퉁이 마다 고통과 불안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그리고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살다보면
인생은 언제나 모퉁이 길.
외로움도 섭리라는 것을.
Unlearn
배운것을 잊는다.
애써 배운 지식과 습관을 버린다.
내게 희망이었던것들을 버림으로써
나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곱게 포장된 삶은 더 이상 나의 꿈이 아니다
안락한 삶도 미덕이 아니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나는 배운것을 잊기위해 걷는다.
구분되지 않는 거리감.
미덕의 파괴.
즉흥의 기쁨을 누리며.
남근 바위와 철쭉
모든 처음은 단 한번 뿐이다.
첫 사랑도
첫 산행도
처음이기에 새롭다.
그 처음을 음미하는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를 옮겨놓는다.
새로와지는 삶이야말로
삶이다.
먼지에 뒤덮힌 삶을 닦아내기위해
나는 파란 하늘을 찾아 나선다.
투명한 하늘아래
나를 가만히 방생한다.
나는 놓여난 물고기처럼 싱싱하다.
단순한 것을 사랑한다.
모노크롬을.
단순한것을 사랑한다는것은
드러나 보이는것보다
사물의 내면을 사랑한다는 뜻이리라.
지금 내 눈앞에는
바위와 길이라는 두 주제가 놓여있다
움직일수 없는 부동의 사물과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길의 역동성.
나는 대립되는 두개의 세계가 만드는 긴장감을 즐긴다.
산행 재미란 이런것이다.
구정봉
구정봉 가는 길에
산은 나의 태양이다.
산은 비로소 나를, 나의 길을 비춰 주었다.
산은 나의 선물이다.
나에게 기쁨을 주었다.
산은 나의 다리
내 영혼과 삶을 이어주는 다리다.
나는 비로소 그 다리를 건너
여기까지 왔다.
아홉개의 샘이 있다는 구정봉
억새밭에서
- 후 기 -
여래는 오는곳도 없고 가는곳도 없다.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다.
나는 산인가 여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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