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행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산행에 주체적이지는 못하다.
성실함을 주체적인것으로 착각하고
늘 한복에 달린 옷고름처럼 여기 저기 딸려 돌아다니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 산행은 내가 주체가되어 이루어 진것이다.
가을이 가기 전에 마무리해야할 숙제처럼
설악은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기어이 남아있었다.
주체의 탄생을 축하하는 뜻인지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설악산 서설이다.
뜻밖의 눈으로 걸음들이 다 온전치 못하다.
일기예보를 원망해야 무슨 소용인가.
여기는 설악산이 아닌가.
매사에 自若함이 내 성정이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무심무태의 자연인으로
눈내리는 설악을 주유 한다는것은 아무래도 낭만과는 거리가 먼 짓이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야한다.
희운각까지는 내리막 길이다.
눈 덮힌 경사길 내려서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조심 조심 내려 가고는 있지만
발밑이 미끌릴 때마다 간이 콩알만해졌다.
고도가 낮아 질수록 눈에 빗낱이 섞이며
길이 젖어 오히려 발걸음이 얌전해졌다.
그제서야 밤잠을 설친채 차멀미에 시달리며 불순한 컨디션으로
대청봉에 올라온 악몽으로부터 조금씩 헤어나는듯 싶었다.
8시 30분까지 희운각에 도착하겠다는 열망은 처음부터 좌초되고 말았다.
멀리 희운각이 버려진 종이처럼 보일 무렵에
변덕심한 시어머니처럼 설악은
흔뜻 본 모습을보여주었다.
보여 주긴 보여주었으되 어찌나 감질나는지
풍미없는 생선을 맛있다고 조근거리는 식객처럼
쓸데없는 찬사에 카메라만 눌러대며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비를 맞아
신갈나무의 붉은 우덤지는 새살돋아나듯 싱싱했다.
처음 산을 보는 내 신명이 또한 그러했다.
비거스렁이를 하느라고 바람은 불었으나
추위를 느낄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따뜻했다.
구름은 오며 가며 즐겁게 비를 뿌렸다.
喜雲閣 구름은 이름 그대로의 즐거움.
장대한 능선들은 기쁨의 구름을 머금은 채
정선의 진경 산수를 보듯 빼어났다.
매번 비와 함께 시작하는 설악산 산행.
일말의 희망을 오늘에 걸어 본다.
희운각 헬기장에서 우측으로 돌아 천불동으로 들어섰다.
좌측으로 돌면 공룡능선 길이다.
계곡 상부의 가을은 오려를 베어낸 논처럼 허전한데
비를 맞아 빛을 거두어들인 암벽들은
풍파에 닳은 백골처럼 얼씨년스럽다.
아무리 공을 들여 사진을 찍어도
빛은 이미 마음에서 멀다.
가을을 이미 보낸 불국토에는
허기진 물소리가
철지난 주막집 육자배기처럼 흐른다.
단풍은 이미 지고 잎들은 오가리들듯 몇몇이 가지에 겨우 달렸는데
그나마 바람만 불어도 우슬 우슬 떨어질것처럼 위태하다.
비가 내린다.
희운각에서부터 내리던 비는 데림추처럼 따라다닌다.
하루 종일 비가 올 모양이다.
자꾸 비에 젖는 카메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온 몸이 이미 비로 젖었다.
양폭 대피소에서
조르주 상드를 걱정하는 쇼팽의 심정은 아니지만
비가 오늘 산행에 도움이 되지않는것은 분명하다.
사랑을 얻기위해 영혼의 상처를 감내한다는 상드의 말처럼
비는 무언가를 얻기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대상일까.
사랑하기 위해 받는 상처처럼
옷엔 이미 빗물이 혈흔처럼 가득하다.
계곡이 깊어 질수록
녹빛으로 뒤발한 쇠담처럼
만추의 추색이 음산하다.
계곡을 따라 올고르게 누벼진 가을 길을
온 몸의 깊이로 빠져든다.
비에 젖은 채 가을의 더없이 깊은 늪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
수십번의 가을을 맞았지만
처음 느껴보는 깊은 맛이다.
스톤아일랜드의 찰진 홍차맛 아이스크림이 생각났다.
세상의 모든 끝이 다 아름답듯
산행의 말미에 나를 진정으로 기다리고 있을
궁극적인 "잘된 마무리"를 기대하며
비 내리는 천불동을 내려간다.
마침내 앳된 가을을 만난다.
단풍길의 초입은 노랑으로 시작되었다.
볕이 지워진 음산한 빗길을 애써 밝히려는듯
옅은 주황의 물결이 머리 위에 눈부시다.
빗방울에 풀린듯하던 발밑이
비젖은 낙엽 위를 고이 지나며
뽀드득거리는 소리를 낸다.
발걸음마저 앳되다.
빗방울이 훨씬 씨알여문 그리움처럼
가을을 툭툭친다.
나는 해거름녘에 찾아 온 길손인양
나무 아래 비를 피한다.
마음이 들떠서인지 기다림조차 즐겁다.
어자피 오늘은 공룡능선을 타지 않은 관계로 시간이 많이 남는다.
그러는 잠시 오방의 가을은 새삼스레 빛을 부추겨
순식간에 계곡을 추색으로 물들게한다.
봉우리 봉우리 마다 보살을 닮은 불심이 가득하다.
부슬비가 가을을 살찌게 할리 없지만
시월 상달 마지막 날 산중에서 만난 비.
푸숲 우거진 계곡을 흐르는 거미줄같이 겸허한 물줄기.
안개 속에서 빛나는 여인의 치아.
먼산에서 내려 온 노인의 추위.
갈대밭 쌓인 마을에서의 개 짖는 소리
집없는 자가 떠나는 길.
어디선가 어디선가 가까와 보이는 소설의 끝.
한걸음에 가을이,
그리고 가을을 들려 주는 고은 선생의 작은 목록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산을 내려가기 싫어진다.
머리 위로 이따금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커져갔지만
달빛을 훔치고 달아나는 구름처럼
근심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계곡을 내려갈수록 가을은 더 촘촘히 깊어갔다.
나는 늦가을에 홀린 술꾼처럼
천불동이 만들어 내는 신비한 광경에
얼을 맡긴 채 가을과 함께 떠다녔다.
물이 흘러가듯 나도 흘러갔다.
가을은 그냥 그렇게 고와 매양 황혼녘 같기만했고
나는 마루 밑에서 꿈을 꾸는 강아지처럼
비가 아무리 차가와도 그 꿈을 깰줄 몰랐다.
오늘 하늘이 맑았다면
나는 하늘을 담기 위해 또 얼마나 옹색한 노력을 해야 했을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손바닥만한 공간이다.
계곡은 온통 수직의 풍경으로 꼿꼿이 긴장하고 있다.
하늘을 구획한 미세한 선들이 솜씨 좋은 바느질처럼 촘촘하다.
문득 눈앞을 가로막는 적벽을 휘감고
계곡은 소리없이 몸을 숨긴다.
긴 뱀처럼.
가을 그림자처럼 길은 멀다.
물은 서둘러 자리를 비워내고
마침내 앞치마처럼 푸짐한 소를 만들어 낸다.
끝도 없는 즐거움이 흥분과 서로만나 투덜거린다.
이 끝없는 즐거움을 어찌하란 말인가.
나는 아기가 고이 자는 방을 돌쩌귀 소리나지 않게 들어가는 모양으로
조심스레 길을 내려간다.
마음만 예외로 부산하고 사위는 고요하다.
산을 내려갈 수록 물색없이 가을빛은 곱기만하고
백골을 쳐바친듯 바위는 무심하다.
세상은 잠든듯 휴식하되
나 지나는 길목만 깨어있어 몹시 감상적인 잡념들이 날벌레처럼 끼어든다.
이 늦은 가을날 이 산 속에도 희비의 업은 교차하나 보다.
하루 중의 무거리가 부질없는 자취처럼 따라 다니며
묘한 우울함을 몰고온다.
비를 타고 흐르는 정적이 음울하고 습한 기운으로 변해
작은 소름이 공포처럼 몸을 감고 밀려들 즈음
참으로 청량한 풍경을 또 만난다.
풍경은 불현듯 눈 앞으로 다가와 해동갑하며 따라오던 이들의 발길을 동시에 멈추게했다.
사나운 꿈자리 뒤끝처럼 말이 귀찮아지고
느낌이 가식같다.
몸부림을 대신해 내뱉는 탄식처럼 호흡이 무겁고 길다.
말을 아껴야 하는게 아니라 아낄 말조차 찾기 힘들었다.
대미를 위해 달려 온 소설처럼
온갖 긴장이 클라이막스를 위해 고조되는 기분이었다.
공룡능선의 한 자락이 화려한 단풍을 낮게 누르며 너울춤을 추듯 솟았다.
일찌기 비교해 본 바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침묵이 얼마나 최고의 아름다움을 위한 찬사인지를
몸 전체로 느낄 수 있었다.
담을 길 없는 아름다움을 담아야 한다는것은
의무 이전에 고통이다.
고통스런 희망이다.
금강굴에 올라서고서야 그것을 느꼈다.
공룡과 화채능선이 마음껏 아름다움을 뽐내는 사이로
계곡길이 수줍은듯 길을 낸다.
그것은 길이 아니라 긴 탄식이다.
말할수 없는것에 대한 괴로움.
언어로 대신 할수 없는 불입문자의 세계.
천불동은 그것을 가르쳤다.
장군봉,형제봉,적벽이 나란히 비선대 위에 서있다.
금강굴에서 바라 본 공룡 능선
비선대
고등학교 시절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왔다.
그 무렵 기억 중에 지금도 남아있는 유일한 풍경이 눈 앞의 이 광경이다.
무수한 돌들이 강을 이룬 이곳에서 나는 사진을 한장 찍었다.
청회색의 그 돌빛이 나를 사로 잡았다.
건천인 이곳에 앉아 생각했던 바를 지금의 나는 알지 못한다.
지금의 알지 못함을 그 때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와 지금이 일초의 틈새 없이 아주 밀착된 기분이 들었다.
- 후 기-
산을 오르고 또 올라도
산은 지난 세월을 말해주지 않는다.
오늘은 다 내가 새로 이룬것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여기에 왔고
이제 그 기억의 깊이 만큼 나는 낡은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 낡음이 결코 서글퍼 할일은 아니다.
나는 변한것이 아닌 오직 변하지 않은 그 무언가를 찾아 여기에 왔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가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남은 그 무엇.
그것이야말로 오늘 나를 주체에 서게한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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