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머물러간다는 월유봉을
주적 주적 비를 맞으며 아내와 함께 올랐다.
아내는 달이고
나는 물이었다.
월유정 강 아래를 하릴없이 돌다
흠씬 달빛 훔쳐 달아나는
나는 물이었다.
일봉에서 뻗어나온 작은 암릉 끝에
정자를 하나 올려 놓을 줄 안 안목이 부럽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절벽 끝에 정자를 배치하여
자연 속을 찾아가는 한국 정원의 전형을 보여준다.
절제를 통해 우주와 소통하는
한국적 여유가 듬뿍 묻어나는 건축 구성이다.
월유정 아래를 휘감아도는 강물.
이것이 오늘 본 풍경의 전부다.
심심하면 월유봉 다섯봉우리를 한번 타고 내려오면 그만이다.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높이라해봤자 400m 남짓한 산들이다.
그런데 이 작은 풍경 하나가 참 거룩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담백한 풍경이란
이런 경치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한폭 그림같은 풍경 속에
내가 놓여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하루가 아닌가.
횡재를 맞은 기분이다.
호두가 익어간다.
건강한 숫컷의 불알 두쪽이 연상되어
아랫것에 부질없는 힘이 들어간다.
개망초 핀 산길을 지나며.
일봉에서 본 산아래의 모습.
우리나라 지형과 흡사하다.
한반도에 전운이 감도는 느낌이다.
갑자기
크르렁거리며 천둥이 운다.
상수리나무 위로 후두둑 콩알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산비둘기 날아가는 소리같다.
하늘이 또 이렇게 심술을 부린다.
산 아래 내려가면 그치고 말 비가 아닌가.
빗속에도 반도의 허풍이 담겨있나보다.
주위는 온통 비구름
이런 날은
나무 한그루 외로운 풍경이 아쉽다.
빨래하는 아낙.
황간 시골 아낙이라해도 범일동 지리를 나보다 더 잘 꿰뚫고 있는 분들이다.
머리를 씻으려니
비누와 대야를 주었다.
적당히 비를 막아주는 가운데 세수를 하고 땀을 씻었다.
흐르는 물에 빨래를 하면 빨래가 더 희다고
예전 고향 월내천 서답거랑에서
사촌 누님이 해 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십년 세월이 정말 물 흐르듯 흘러갔다.
7월의 청포도밭
칠월의 청포도 밭이야 전부
육사의 그늘이 아닌가.
흰 봉투 고깔처럼 쓰고
청포도에 옥빛이 더해간다.
저 멀리서 나를 찾아 올 손님과 같은 아내를 향해
'청포도 사랑' 한자락 불러본다.
그런데 신기한것은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귀에 익은 '도미'의 '청포도 사랑'이 아니라
빡빡머리 '이정'이 부른 '청포도 사랑'이다.
느리며 나긋거리는 가락.
기타줄에 간당 간당 달려있는듯한 멜로디.
세련된 현대 감각으로 편곡된 노래다.
"구름은 꿈을 싣고 두둥실 떠가네 오 오오오~~~~오"
감정이 절정에 오르자 슬그머니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누구의 노래이면 어떠한가.
청포도는 익어가고
파랑새는 날아갔다.
파란 많은 시인도 이미 세상 떠난지 오래다.
그래도
은쟁반처럼 반짝이는
옥빛 사랑은 청포도 과즙만큼이나 달콤하게 남아있지 않은가.
노래도
시도
사랑도 다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저 멀리 돛단배처럼 떠나버린 셈이다.
無心川
청포빛 강물에 월유봉이 비친다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없다.
" 뭐가 진리인지는 아무도 모르지요,진리를 깨닫은 자가 어디있답디까? "
.....
진리가 없다는데 하물며 깨닫음이야!
한없이 無인 진리와 그 無를 破한 깨닫음을 담고 강물은 흐른다.
- 후 기 -
월유봉 아래에서 물놀이를 하다
생각보다 물살이 세다는 느낌이 들자
물 밖으로 나왔다.
20년간 거의 매일 수영을 해 물놀이엔 어지간히 자신이 있었지만
일행들에게 공연한 걱정을 끼칠 필요가 없어서이다.
마르지 않은 윗옷을 입고 아내 곁으로 갔다.
새삼 팔에 닿은
아내의 몸이 참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은 이런 따뜻함으로 데워지는구나.
이 따뜻함을 이렇게 가까이 느낄 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아내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Morgen (내일)
R. Stra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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