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 시전에 행락 시전, 입시 시전이 겹쳐 출발부터 고속도로가 아수라장이다.
누구의 제안이라 할것도 없이 차 머리를 즉석에 돌려
밀양 억산으로 향했다.
밀양 억산이 누구의 머리에서 어떻게 탄생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탁월한 선택이었다.
11월 말이 되어야 제맛이 든다는 얼음골 꿀사과.
바야흐로 그 시전이다.
사과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농익은 사과처럼 산도, 들도 붉게 탄다.
사과 나무 과수원을 지나며
일행들의 마음도 몹시 들떤다.
아름다운 산 아래 예쁜 과수원.
누구라도 나이들면 이런 곳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싶을터.
감나무 몇 그루,대추나무 몇 그루.
여기에 사과 나무 몇 그루 더하면 금상첨화.
딱 그런 곳이 밀양이다.
사방 어디에도 가을에 손닿지 아니한 곳이 없다.
일주일 단위로 쉬지 않고 산행을 계속한 내가 아닌가.
쉰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언제 이렇게 제대로 세월을 실감한적이 있었는가?
산행을 통해 누리는 복중에
이처럼 세월을 오감으로 느낄수 있는 재미가 제일이다.
눈앞에서,코 앞에서,손끝에서 가을이 느껴진다.
미루나무 한그루.
함화산 기슭을 가리고 서있다.
산다는것이 오래라 믿고도 사는것이고,잠시라 믿고도 사는것이지만
마음에 금이가고, 믿음이 무너져도
이렇게 세월은 기다리는자에게는 무한한 위로를 주나보다.
지난 여름 땀 흘려 올라갔던 길에
여름의 냄새가 얼핏 묻어난다.
긴 기다림의 냄새가.
여름의 향기가.(클라우드님의 감각)
가난한 발을 가진 내가
뒤늦게 아름다운 산을 사랑하여,
사랑한 나머지
가을비처럼 낙엽이 우수수 내리는날
산길을 따라 걷는다.
산을 나타샤라 한들 어떻고
쓴 소주 라 한들 또 어떠랴.
님들은 벌써 떠나가고
나는 남아있는 가을과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눈다.
산길을 오르는것이
더러워진 세상을 등지겠다는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사랑을 알뜰이 보듬는 일리라고.
문득 아름다운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위해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농 담-
내 사랑을,
내 삶에대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 아파야 하는걸까?
떡갈나무 사이로 억산 깨진 바위가
위용을 드러낸다.
언젠가 차근하게 숙제를 풀듯 다시 오르고 싶은 산이지만
마른 가지 사이에 설비친 모습이
신비롭기조차하다.
여인의 속살처럼 덜추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것이 산의 속내이다.
오늘을 놓쳤으면 언제 이 풍경을 두번 다시 찾겠는가.
산을 오르면서도
이것이 다는 아닐거라는 생각이 염치없이 따라다닌다.
물기 없는 올 가을 단풍들을 수없이 책망하였건만
여기 억산에서 제대로 녹슨 가을을 만난다.
마음을 애써 비우려하는것도 일종의 강박이요,
세상사 모든일에 의미를 찾으려 하는것도 일종의 강박이다
들고 남이 바다의 조수처럼
자연스러워야한다.
자연스러움이란
있는듯 없는것,없는듯 있는것.
또한 그것을 구별하지 않는 마음이다.
가을 산인들 어떻하며,겨울 산인들 또 어떻랴.
만산에 가을이 집요하다.
자신에게 잘하는 삶이 오히려 쉬운것이라는걸
나는 산행을 통해 배웠다.
자신을 억누르기보다는
스스로의 삶을 가치있게 하는것에 눈뜨야한다.
세상사를 스스로 성숙할 수 있게 내버려둬라.
오히려 그 속에서 리듬을 찾아라.
산에서 비를 만나면 비를 맞고
그치면 행복을 만나라.
산을 오르는 운무는 산만 아니라 그 산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도
깨끗이 씻어준다.
템포에 맞추어 가고 서는 일.
그것은 몸과 마음에 이로운것이다.
이런 여유로운 삶 속에서 비로소 자신과 타인을 더 사려깊게 바라보는 눈이 트인다.
앞을 나서야 한다는 강박감에 떠밀려
갈림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문바위, 수리봉 가야할 길을 반토막내어 잘라버린것이다.
실수를 호기있게 무시한다.
즉석 산행의 재미같은것이 느껴진다.
어서 가자, 가서 재미있게 놀면 될 것아니냐.
산대장이 된것같이 건방을 떨어본다.
벌써 다왔다.
멀리 있는것은 다 아름답다.
손에 닿을 수 없기에.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 하지마라.
이별이란 헤어지는것이 아니라
멀어지는것이다.
오세영 시인의 싯귀절.
멀리 보이는 산이기에 더 아름답다.
산행은 늘 반통의 물을 긷는 일.
내 반쪽의 몸이 마비되어
절뚝이며 가는 길.
늘 내 몸뚱아리는 물이 반쯤 찬 기분이다.
그래도 난 기세좋게 오늘도 산을 오르고
내 빛나는 땀방울로 길을 적신다.
다리가 저려 피가 돌지않는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굳어져 온다는것을 느끼면서
나는 또 산을 오른다.
반쯤찬 물통이면 어떠랴.
내가 가는 길, 내가 살아기는 길이 늘 이럴 뿐인데.
내가 끊임 없이 산에 오르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으로부터,내가 안고 있는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일 수 도 있다.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내 성격적인 탓도 있겠지만,
과거의 아픔을 떠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무의식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원래 나약한 존재라서, 늘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있다.
잠시 마음을 놓고 있으면 온갖 시름과 걱정들이 나도 모르게 스며 나온다.
그걸 떨쳐내려고 숨이 턱에 차게 달리고, 또 산에 오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기 까지이다.
정원사의 일은 봄의 길을 준비해 주는 것일 뿐,
봄을 빨리 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이 마른 연못에 사는 물고기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물을 만나듯
계절의 끄트머리에서 한꺼번에 가을을 만난다.
세상에 가을이 지천이다.
과실향처럼 가을이 진하다.
잘익은 포도주처럼 나는 취한다.
호수처럼 맑은 하늘에 가을을 그려본다
온 몸이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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