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 부터 달음산에 오르고 싶었지만
차일 피일하다
새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산으로 나서게 되었다.
지척에 산을 두고 빙빙 돌며
뜸만 들인 꼴이다.
작은 소망 하나 이루었다 싶어
유달리 마음은 가벼웠으나
전날 치과 치료를 모질게 받은 후유증이 남아
몸은 한짐 반이 된 기분이었다.
봄향기가 좋긴해도
새순같은 초봄의 향기만 하겠나.
그 향기는 농밀하기도 하려니와
수줍기 짝이없어
마치 코끝을 살살 건드는 아지랑이같이
춘정을 느끼기에 좋다.
오호 매화라!!
네 춘심 불밝히려
어젯밤 하현달은 밤늦도록 질 줄 모르고
함박산 너머 곰내재에 넘던
입춘 바람은 조용히 소리 죽여
되돌아 왔구나.
오호 매화라!!!
산에오르면 이 산과 저 산과의 거리감
우리가 걸어가야할 길들이 지니는 시간의 길이들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다.
아직 산행 경험이 일천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길이가 결국은 내 몸의 여건에 좌우되는 것이니
고무줄처럼 길은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한다.
눈앞의 실처럼 풀린 저길이 오늘의 회귀선이다.
월음산 뒤로 일광 앞바다가 보인다.
한창 도시화가 진행되는 곳이다.
풍광 좋은 옛모습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이렇게 산 위에 올라 세상을 보면
그 변화 조차 미미해 보인다.
달음산은 저기 보이는 내 고향 월내와
아버지 묘소가 있는 백운 묘지의 중간에 위치한다.
아버지 산소에서 보면
언제나 이정표처럼 달음산이 우뚝 앞을 가로 막고 있다.
고향 인근에서도 제일 주봉으로 치는 산이 달음산이다.
아버지는 달음산을 거쳐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은 또 달음산을 거쳐 아버지를 뜨올리게 하니
달음산이 고향이요, 아버지가 된 셈이다.
햇볕의 사전적 의미는 물론 태양광을 뜻하는 것이지만
봄의 경계선에서 맞는 햇살은
마치 햇과일이나 햇반의 '햇'처럼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 든다.
달음산을 오르면서 맞는 햇살은
여지껏 맞아온 묵은 햇살이 아니라
첫 봄의 첫 햇살이었다.
취봉(독수리봉)과 옥녀봉(구슬아기봉)
달음산의 의미는 '높은 어미'를 뜻한다고 한다.
동해의 빛을 제일 먼저 받는 산.
천성산으로 부터
백운산 함박산 아홉산으로 이어지며 용천 지맥을 이룬다.
암릉구간의 기암들이
장골들의 뼈대처럼 믿음직스럽다.
봄을 맞아 인근 산악회에서 시산제를 올리러 많이 왔다.
산행에 있어서의 안전이라던지
좋은 일진을 내려 받는 것은
오로지 산신님의 뜻에 달린것이지만
산을 오르는 자의 소임과 자세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할것이다.
한 눈에 고향 산천을 굽어 본다는것은
비록 내가 여기서 태어난것은 아니지만
조상들의 삶의 터전을 되돌아 보는 것이다.
삶의 퇴적층.
내 아버지 이전의 아버지의 삶의 터전을
가슴으로 느끼는 일이다.
용천리 전경
용천 저수지 뒤로 우리가 넘어야할 아홉산이 보인다.
사실 이 시점에서조차 우리가 저 산을 넘어
더넓은 "환주"(내가 만든 단어다)의 고행길을 애써 접어들게 될 줄은 몰랐다.
저 마의 고개를 아무런 내색없이 아니 기쁨에 찬 얼굴을 지으며
오르게 될 줄 꿈에서도 짐작하지 못했다.
지금에야 그 산이 다 장해 보이고
그 언덕 하나 하나 다 정이 간다.
달음산 북서면
저 멀리 정관 신도시가 보이고
아버지 누워 계신 백운 묘지도 보인다.
이십년이 넘게 바라만 보던 곳에서
아버지 계신 쪽을 거꾸로 바라보니
홀연 아버지계신 곳이 멀어 보이고
멀어 보인 만큼 가슴 언저리는 더 뜨거워짐을 느낀다.
멀다고 먼것이 아니라
진정 먼것은 마음으로 부터의 거리이다.
설악산이라 우길 참이었다.
천마산을 오르며 뒤 돌아본 달음산.
반대편 에서 바라보면
마치 왕관이나 화관을 쓴것처럼 멋져 보인다.
정관 신도시의 전경
짓다만 촬영 세트처럼 허전하다.
새 도시로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
달음산에 정 붙이고 살게 될까.
아버지 모셔진 쪽이 어쩐지 위태해 보인다.
산자들의 세상과 너무 가까와져 버렸다.
함박산(458m)
산을 오른다는것이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와 같이
자신만의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를 스스로 듣는거와 같은것일거라
생각됩니다.
현을 타듯 길을 걷고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을 누르듯
길을 걷습니다.
내 심장 소리
내 거친 호흡음이 곧 음악입니다.
창조적 산행이란 어떤 것일까요?
처음 걷는 산길,
단순히 처음 오르는 산봉우리이기에
굳이 창조적이라 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산행을 통해 연주자가 소리를 만들어 내듯
자신 만의 산행을 만들어 내는것
오감을 열어 자연을 맞이하고 찾으려는 노력이야 말로
창조적이라 할수 있을겁니다.
단지 즐거움을 향해 다가가는 쾌락적 산행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덮고있는 한꺼풀 허물을 벗는 자세
또 벗어려는 의지
이러한 노력들을 창조적이라 할만합니다.
세상을 본다는것은
어짜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것은 아니다.
내 관념의 습관을 대하는것이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나무와 길이 내 관념의 그림자인 셈이다.
사진은 그림자의 예술이다.
예술이 꼭 아름다울 필요는 없지만
나의 사진은 그 조차 요원해 보인다.
언제쯤 나는 내 관념의 그림자로 부터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림자에 묻어 있는 그리움의 깊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광택이 없는 흑백의 세계가 참 밋밋하다.
나는 흑백을 좋아하는게 아니라 모노크롬을 좋아한다.
색을 싫어하기보다는
색, 빛에서 조차 단색광을 좋아할만큼
내 의식은 단순하다.
진리가 복잡하리라 여기지는 않습니다.
진리로 가는 길이 어려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길 조차 어려울 리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벽 뒤에 답을 두고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
우습네요.
나쁘지 않은데요.
아 !바로 이거였군요.
하하하
세상을 모두 설명할 이유가 있을까요?
세상을 설명하라
누가 강요한적 있나요?
세상이 그대에게 친절해야하나요.
세상을 한번 설명해 보세요.
세상은 사진 한장 감상하는 거랍니다.
사진이 문득 시간을 가두어 버립니다.
사진의 묘미죠.
자, 이제 나는 소금 기둥처럼 멈추어 섰습니다.
잘 살펴봐 주세요.
잘 들어봐 주세요.
삶이 그대에게 무어라 하는가요.
진리를 말하나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삶을 향해 끊임없이 지껄일 참입니다.
그게 더 쉬우니까요.
말 못하는 진리가 무선 소용일까요?
벙어리가 되어버린 복음이 진리인가요?
나는 내 삶에 쉬지 않고 참견합니다.
삶이 내 소리를 들어주던 말던
어짜피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는거니까요.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삶.
이제 이 길 내려 가면....
내려가면 끝이다.
이 끝이라는 말에 목이 메인다.
물도 없고
다리도 아프고
마침내 허기진다.
세상 만물이 다 달디 달게 다가오고
세상 도처가 다 편안한 안방같다.
진리가 발바닥에 붙어 안달이다.
하하.
- 산행 후기-
산행은 목마른자의 것이다.
쓰러진 자에게는
일어날 마지막 용기와
일상에 지친자에게는
그림자와 같은 그리움을 준다.
그 빛들이 다 서늘하다.
2악장 (Adagio)
Ragnhild Hemsing, Violin
live from Kazan -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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