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0분 오색 출발
丑時를 넘어 당도한 山中의 객회가 수수롭다.
꿈속인듯 여장을 꾸려 산에 오른다.
새벽 네시다.
아직 새들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다.
35년만에 다시 찾은 설악산.
그 때는 수학 여행이었고
이번에는 제대로 마음먹은 산행이다.
비가 온다.
비를 맞으며 대청봉 비탈길을 오른다.
문득 오보에 소리와 같은 중간음의 새소리가
화려한 산중의 오케스트라를 깨워낸다.
짙은 안개를 타고 산중에 새 소리가 가득 흐른다.
비에 젖은 몸에서도 모락 모락 김이 오른다
안개와 한무덩이가된 내가 떠다닌다.
깊은 섬에 갇힌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외면한 채 무심히 걷는다.
유령처럼 비옷을 입은 이들이 스쳐간다.
긴 오름길이어서인지
부실한 생각들이 무한 충전된다.
숨소리 조차 다 생각이다.
생각이 없는 생각의 경지를 찾아헤메이며
속살이 젖도록 비를 맞고있다.
몰입이란 이렇게 젖는것이다.
07:23분
진딧물처럼 정상석에 다닥다닥 붙어 인정 샷을 날리는 인파를
오늘은 볼 수 없다.
이것도 행운이다.
무주공산에 문득 주인된 기분으로 만세를 불러 본다.
월드컵에서의 승리 때문인지
느닷없이 대한민국 만세가 터져 나온다.
천지 사방이 구름에 갇혔는데
나 혼자 무대의 중앙에서 만세를 부르는 형국이다.
좌우지간 나는 이렇게 대청봉에 올랐다.
08:00
멀리 설악산 서북릉
대청봉에서 지척인 중청봉을 지나 소청으로 내려가던 중에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들려왔다.
이렇게 산중에서 약속이나 한듯 함성이 터져 나오는것은 더문 현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상을 덮고 있던 안개 구름이 서서히 닫혔다 걷히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산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야 말로 仙景이요 秘景이었다.
하늘이 오늘 아침 비를 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나 보다.
황홀한 풍경에 눌려
생각이 생각을 지우느라 할 말이 없어진다.
사념이 없는 坦懷의 경지
우주의 중심에서 일갈하는
유아독존!
얼마나 웅장한 대자연의 파노라마인가.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나를 더 느끼기 위해
나는 멀리, 볼 수있는 한 멀리 세상을 마음껏 품어 보았다.
하늘이 내려 준 갑작스런 선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산님들이 길을 막고 仙景을 담기에 바쁘다.
꽉찬 행복이 유월의 녹음처럼 넘친다.
한 순간의 열정으로
세상을 다 표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무가 속에 잘 타는 성분을 간직하듯
설악은 늘 설악 이상의 것을
비장하고 있었던거다.
아무에게도 보여 준 바 없는
이 청순한 아름다움을,
이 표현 할 수 없는 정결함을
내 사진기에 초라히 가둔다.
용아 장성
외롭게 묻어라
마음 언저리에...
붓을 포도주에 담궈
태양같은 해바라기를 그려 낸 고호처럼
수많은 근심을
환한 기쁨으로 바꾸어라.
차가운 새벽의 명백함 뒤로
감긴 눈에 영원이 번뜩인다.
마음을 열어
고요히 태고에 누인다.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침봉군이 저 유명한 용아장성이다.
금단의 정원
그 초입에 봉정암이 놓여있다.
세잎종덩굴
산행의 가치를 발걸음으로부터 나오는것이라 생각했다.
더 높은 산을 올랐고 더 멀리 나아갔다.
그러나 때로는 풍경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풍경과 마음의 오묘한 unison.
마음과 풍경의 이 황홀한 齊奏를 통해 나는 무엇을 얻는것일까.
자유가 찾아 온다.
버림과 채워짐이 바람처럼 오고 간다.
그리고 마침내
빈틈없이 채워진 이 空의 조밀함.
나는 속이 꽉 찬 이 세상의 정물성이 좋다.
세상이 빈틈없는 하나의 풍경이다.
숨을 멈춘다.

공룡 능선
쳐다만 봐도 가슴에 천금을 얹어놓은것 같은 중압감을 느낀다.
세상의 저울추 공룡능선.
맞은편 용아장성과는 달리 힘찬 기세가 세상을 지긋이 압도하는 분위기다.
비록 오늘은 여기 까지지만
언제고 힘을 길러 저 흰 백악의 암릉을 모두 넘어리라.
세상을 둘러보니
행복은 반드시 눈앞에 놓인것만이 아니라는것.
옆과 뒤통수에 걸린 수많은 평범함도
행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행복론에 잠긴다.
08:56분
봉정암
봉정암을 향하는 수많은 이 땅의 여성 신도들을 보노라면
봉정암으로 가는 길이야 말로
산티아고의 길이라 생각된다.
이 나라 불교도라면
모름지기 한번은 꼭 다녀오고 싶은 곳이지만
봉정암에 이르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하다.
어머니는 이 험한 길을 올라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봉정암 적멸 보궁을 찾아가며
번뇌 망상
긴 골에 다 풀어놓으시고
깔딱 고개에서 쉬고 계셨을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날 어머니는 필경 나를 위해 기도하셨을 터이다.
그 기도 덕에 나는 또 여기까지 왔다.
그날 철야정진 하신 어머님만 못해도
나도 내 자식들 또 그 어머니를 위해 잠시 기도하고 돌아간다.
손에 잡힐듯한 공룡능선
가야동 계곡 아래를 보며
떨어져버리고 싶은 이상한 충동을 느낀다.
죽기로 마음 먹는다면
이곳에 몸을 날려
내설악의 백골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다.
그 아련한 깊음이
치통 끝에 오는 가느다란 쾌감처럼 마음을 아리게한다.
이런 감상도 잠시
얼른 자리를 비켜 달랜다.
죽기 좋은 장소는 사진 찍기에도 좋은 법이다.
행복이 뒤통수에 걸린 기분이다.
구곡담 계곡과 수렴동 계곡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계곡길
나는 이번 산행을 위해 여러모로 많은 준비를 했다.
우선 잘 먹었다.
덕분에 2kg정도 살이 쪗다.
아침 수영 시간에 잠영을 많이 하였다.
처음 부터 스피드를 내는 스피드 훈련도 했다.
덕분에 지난번 덕유산 종주에 비해 지구력이 많이 좋아졌다.
몸이 좋아지니 산행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이 생긴것이다
여러모로 기분좋은 산행이다.
긴 길을 걸어 왔건만
생각의 빚인 말들이 선뜻 나서려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그냥 아름다움으로 느낀다면 어쩔것인가.
구겨진 지도 위에
신들의 견해를 휘갈긴듯한
신묘한 풍경들에 혼을 맞기고
나는 슈베르트가 남긴 후기 피아노곡의 느린 리듬을 떠올리며
물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물소리와 새소리가 어울린 참 음악적인 행보다.
음표가 소리의 언어이듯
물과 바위와 나무가 대지의 언어입니다.
파란 하늘을 한가롭게 건너가는 구름과
이름 모를 새들의 경계음.
잎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점묘의 세계까지
이 모든것이 대지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산을 걷는 동안의 침묵은
단지 침묵일뿐
사실은 자연과의 대화인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긴 하산길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흙향기가 무거운 침묵을 뚫고 훅 하고 터져 나온다
바위 사이를 흐르다 마침내 옥빛이 된 계곡물이
지친 발을 유혹한다.
아주 쓸쓸한 곳이 아닌
조금 사람 냄새 나는 그런 한적한 곳에 자릴 잡고 앉는다
흔듯 흔듯
수수꽃다리 향기 전해오는 계곡 한구석
등산화를 벗고 바지를 걷어
발을 담근다.
굵은 양말 자국.
요만한 흔적조차 없다면
산행을 통해
스스로 맺고 풀것이 무엇이겠나.
새가 오가는 길을 몸속에 품고 다니듯
산도 사람 다닐 길을 품고 산다.
나 또한 자연인지라 새들이나 산과 같이
내마음 속 한 줄기 길을 품고 산다.
물질과 욕망에 매혹되지 않는 길.
그런 길을 그들을 통해 닦으려한다.
14:00
일그러진 결핍감이나
메마른 원망이
대지의 노트 위에 눌러 쓴 글씨처럼
백담사 계곡에 빼곡이 서 있다.
다모클래스의 검처럼
머리 위에서 구름이 위태하게 비를 모은다.
그 비에 탑들은 곧 쓸려나갈것이다.
세상일은 모르는것이다.
모르는것이기에 다 위태한 것이다.
여기서 살다 감옥에 간 대통령을 두고 하는 말이다.
- 후 기-
온통 달로 가득찬 달새의 머리처럼
비를 기다리는 비새처럼
머리 속이 온통 산으로 차있다.
내가 찾고 찾아야할것은 무엇인가
밀물같은 고요 위로
부처의 평화가 미끌어져 다닌다.
세상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어두움 하나로 완전해지는 시간.
동해 바다 위로 단단한 평화의 저녁이 찾아온다.
물고기들도 강을 거슬러 회유한다.
세상은 처음부터 이러했나 보다.
깨우기 싫은 피로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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