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한 욥이 왜 고난을 겪어야하는지를 물었다.
하느님은 노하셔서
욥의 눈길을 자연으로 돌리라고 하셨다.
하느님은 말씀하셨다.
일이 너 뜻대로 되지않는다고 놀라지 마라.
우주는 너보다 더 크다.
일이 너 뜻대로 되지 않은 이유를 이해 못한다고 놀라지 마라
너는 우주의 논리를 헤아릴 수 없다.
산 옆에 있으면서 너가 얼마나 작은지 보아라.
너보다 큰것
네가 이해하지 못한것을 받아들여라.
세상이 너한테는 비논리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것은 아니다.
우포는 분명 나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늪이었다.
그렇다고
이해를 받아들지 못할만큼 어마 어마하지도 않았다.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모습이
열여덟 처녀의 젖가슴같은 그런 풍경이었다.
우리의 삶이 세상 모든것의 척도는 아니다.
사계의 변화를 생노병사에 비유하는것조차 진부하다.
인간이 우주의 논리를 이해 못했다면
태초에 하늘이 그렇게 만든 잘못이 크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세상은 부조리 할 뿐,
인간의 이해를 구하기에는
신은 너무 멀리 있어 보인다.
그리고 또 길을 걷는다.
원시의 토양 위로
가을의 그림자는 깊기만 한데
내 마음 어느 한구석에도
하늘은 없고
나도 없다.
구원도 없고 이해도 없다.
산은 산이요,물은 물일 뿐.
우포는 늪이요
나는 그 늪가를 걷고있다.
우포 지도
높은 산에서 부터
한가로운 수면에 이르기 까지
공평한 평화가 느껴졌다.
한 여름을 알리던 욕망의 뭉게 구름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은 마른 마음을 위장하듯
새털구름 몇조각을 겨우 걸치고 있었다.
마음이 喪中인듯 가라앉는다.
파란 자유의 그늘에 애잔한 물빛이 설핏하다.
구름이 하늘의 푸른살을 가리듯
내가 나를 안고 싶었다.
숨어 있는 배
" 작은 배로는 떠날 수 없네
아주 멀리 떠날 수 없네."
새들은 더문 더문 늪을 채우고
빈 가을의 뒤란처럼 호수는 공허한데
하늘에서
한 무더기의 삐라를 흩어 놓은듯 새들이 내려 앉는다.
거리에서처럼 이곳 우포도
가을을 이별하는 선동으로 가득했다.
고요가 절실해질 무렵
새떼처럼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며 사라져 버렸다.
세상이 본 모습을 드러내듯
비로소 세상의 문이 열렸다.
그 비었는 길로
깡통처럼 달랑거리며
내가 굴러갔다.
사방 어디에도
몸져 누운 가을이다.
세상이 마지막 문을 닫아 겨울을 채비하듯
나무는 맥관을 닫아 잎을 떨군다.
오직 억새만이
보풀처럼 하얗게 인 관모를 뒤짚어 쓰고
고단한 삶을 감춘다.
세월에 패인 이마의 깊은 이랑에
늦가을의 햇살들이 기웃거린다.
세상의 모든 근심들은 다 억새를 스쳐 지나갔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의 윤기나는 꽃대에는
하얀 회환의 군무가 물결처럼 일었다.
이제 그 고난의 상징처럼 가벼워진 머리 위로
또다시 하얀 햇살이 내려 앉는다.
한결 무디어진 체념의 빛이었다.
우리의 삶 어디인가에는 반드시 비칠만한 햇살이 있다.
그 따사롭고 공평한 빛 아래에
세상은 어느 한곳을 향해 기울어 가는 타이타닉이 아니라
거대한 룰렛이 되어 시계처럼 돌고 있다.
욥이 이해하지 못한 세계가 이런것이었을까.
사람을 보되 세계를 보지 못한 탓.
종교를 이해못한 내가 세계를 통해 삶을 이해한다는것은 얼마나 다행이냐.
세상은 늘 내게 회당이요,법당인 셈이다.
가을이 오고
세상이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다하여도
세상이 달라진것은 아니다.
세상은 본래의 모습 그대로이다.
불타는 적단풍도
노란 은행잎도
잎들이 온통 새싹일 무렵에는 다 붉은 빛이요,노란 빛이었다.
삶에 묻혀 스스로를 잊어가듯
푸름에 지쳐 본디의 모습을 잠깐 잊었을 뿐이다.
가을이다.
새가 날아들고 또 떠나가도
늪은 늘 늪이었듯
그 본래의 모습,본래의 빛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바로 가을인것이다.
가을 어디에도
소멸의 모습이란 없다.
소멸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하여도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하는것은
번뜩이는 내 마음의 눈이다.
세상은 無常의 존재다.
빙빙도는 룰렛이다.
그러나 세상이 돈다고 하여 내가 따라 돌아야 할 이유가 없듯
나는 룰렛 위에서 운명을 결정하는
오로지 붉은 화살표가 되어야 한다.
"내 삶은 운명의 수용체가 아니다.
나는 내 운명의 지침이다."
전율과 공포,
인간을 압도하는 풍경들은 숭고함을 준다.
그러나 화려한 정원,
고요한 호수,
낮은 물새들의 울음 소리
이런 기분 좋은 느낌 속에서는
숭고함 보다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늦가을의 기분 좋은 햇살.
가벼운 피로.
신성한 태고의 늪.
키 큰 나무의 쓸쓸한 그림자.
삶을 관조하는듯한 숭고함이 아름다움과 뒤섞여
검은빛 늪의 저변으로
마음을 한없이 가라앉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고요한 풍경 위에서
물결처럼 마음이 고조된다.
살아있는 느낌은 이런 느낌이어야 한다.
과장되지않은 원시의 힘.
우포가 주는 이런 생명력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근원이었다.
가슴에 품을 만한 향수.
청정한 마음에 대비될만한 압도적인 단순함,
그런 풍경 위에 가을의 센티멘탈리즘이 거칠게 치장된다.
사람들을 다 보내고
그림자와 같은 아내와 둘이서 길을 걷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한 무리의 연인들을 보았다.
왜 우리들의 청춘에는 우포가 없었을까.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아내는
"지금이 있지 않아요"하고 외치는듯 했다.
그래 지금이 있지
청춘을 뛰어 넘는 지금
바로 지금.
시간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무상하다 하여도
변하지 않는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이다.
호수에 떠 있는 새처럼
지금은 늘 시간 위에 떠 있는 연꽃잎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실해야하는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은 납덩이처럼 무겁다.
지금은 과거의 힘이요 미래의 정신이다.
과거가 없는 지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로 향하지 않는 지금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추는 한없이 진중해야 한다.
지금에 충실하라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매 시간의 움직임,
매 시간의 결정,
매 시간의 변화에 정신을 집중시켜라.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다.
무거운 사슬이며
복잡하기만 할 뿐 쓸모없는 번민과 근심은
결정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 하다.
마음을 가벼이 하여
직관의 물줄기에 마음을 춤추게 하여야한다.
사람들을 다 떠나 보내고
어두운 밤길을 걷듯 홀로 걷는다.
세상이 보인다.
아름다운 세상이 보인다.
선이며 면이며 색들이 모두 저 마다의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미 제 스스로의 모습을 다 갖추었으므로
내가 세상을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나 스스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나도 세상 다양성의 일원이 된다면 그만이다.
힘주어 걸을것도
고뇌의 거울이 된 세상도 다 필요없다.
나는 걷는다
나는 걷기에 존재한다.
돌을 가지고 놀던 아이가 황금을 발견하면
가지고 놀던 돌을 버리고 황금을 선택하듯
나는 오늘 또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환희와 경탄의 세상.
아름다움도
숭고함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족에 급급한 현세의 따분함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더 크고 더 아름다운 풍경이 필요하다.
우포는 치유의 병상이요
변화를 위한 탈출구였다.
진부한 삶을 떠나보내는 동해 남부선 열차였다.
아프리카 스탭의 바오밥 나무처럼
나는 원시에 갇힌 나무들을 보았다.
비옥한 밑둥
세월의 힘이 느껴지는 굵은 가지,
나는 지금의 나를 잉태시킨 時原의 힘을 느꼈다.
힘의 절대성에 대한 이끌림이었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근원에대한 모처럼의 동경이었다.
동시에 인간의 삶을 증거할만한 수도승과 같은
기품이 있는 풍경이었다.
그 기품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필요는 없다
나무 한그루로도 세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니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생생히 느낄수록
세상의 연민으로부터 나는 더 빨리 멀어지게되는 법이니까.
우포 늪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
탐닉을 자극하는 묘한 노스텔지아의 풍경이다.
수평과 수직이 아름다운 밸런스
떠오르는것을 가라앉히고
가라앉는것을 세워 일으키는
영혼의 힐링.
노랑과 주황의 글라디올러스.
수평과 수직의 아름다움, 난해함 혹은 난처함
수평을 잡기도
수직을 맞추기도 어려운 풍경이다.
왜 그런지는 이 풍경에 몰입하다 보면 이해가 된다.
무수한 샷을 날리며
마침내 참담한 실패의 당혹감을 심어주던 풍경의 지존.
글라디올러스와 같은 수직의 아름다움을 꿈구며
까다로운 수평에 엎디뎌 헤메이다
또 다시 다음을 기약할 뿐.
웅덩이는 가을을 쓸어담기에 바쁘다.
물에 비친 앙상한 가지에 낙엽이 더무 더문 달라 붙어
나무는 새로 봄을 맞는듯 하다
얼마나 단순한 모습인가, 본래의 세상은.
단순함은 숭고함의 기본 골조이다.
세상의 처음 모습이다.
이런 모습의 세상 위에 인류는 문명을 건설했다.
왜곡된 풍경 속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차츰 본연의 모습을 망각해 갔다.
가을은 회복의 계절이다.
비로소 우주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시기이기에
깊은 자각과 본래의 모습을 돌아보는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우포늪 주위를 반바퀴 밖에 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불현듯 바빠졌다.
일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남은 거리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풍경은 애걸하며 나를 끌어 당기고
나는 끈끈이에 붙은 쥐처럼 안절 부절을 못하였다.
마치 난이도가 높아지는 게임에 몰입하는것 처럼
난생 처음 접하는 眼福의 성찬을 목전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매 제방 가는 길에 커다란 왕버들이 누워 자라고 있었다.
사실은 저 나무가 굳이 왕버들일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기왕에 왕버들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이유없이 들었다.
그 위대한 관용의 가지 아래로 하오의 무심함이 지나다녔다.
한번 지나간 사랑처럼
애틋함이나 그리움 따위야 저 세상 가는 날까지 그저 가슴에 묻어두면
그만일 일이지만
풍경 또한 과연 사랑의 속성을 닮은지라
두고 가는 아름다운 풍경은 이별을 예견한 사랑처럼 그 자체로도 충격이요 트라우마다.
주매 제방 지나 소박한 소나무 동산을 만나고 그 오붓한 솔길을 내려 서자
멋진 수평의 풍경 하나가 애인처럼
눈에 폭 안겼다.
검은 가을 바람이 옷자락을 끌듯
물가에는 섬세한 그림자가 바람에 얼룩을 만들며 아른거린다.
세상의 어떤 눈들도
슬픔에 젖을 만한 풍경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가을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였다.
진실로 ,
진실로 가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 풍경 속의 가장 쓸쓸한 곳으로 가볼 필요가 있다.
큰 쓸쓸함은
작은 쓸쓸함을 덮는 위안이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
인간이 고독을 필요로 하듯
쓸쓸함 조차 위안이 되고
치유가 되는법이다.
생의 마지막 불을 밝히는 등불인듯
내 마음의 등불이 될 풍경 하나.
검은 늪의 두눈인 그림자여!
생의 먼 끄트머리에서
명멸하는 흐린 불빛이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후
헤어져 돌아오는 어두운 밤길이여!
나는 저 아름다운 풍경을 담기를 작파하고,
컥컥 울어대는 고니처럼
물 위에 말할 수 없는 허전함을 남기고 돌아선다.
물은 선한 빛으로 남아있었다.
아내의 손을 잡았다.
사랑을 설명하기에는 세상은 단지 비유만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추억을 순장하고 돌아서는
그 시간에도
우포 늪의 그 깊은 심연부에는
까닭도 모른 채 이별한 사랑의 뻘들이
켜를 이루며 쌓일것만 같았다.
추억, 그것이야말로
늪에 묻혀 사라졌지만
마침내 견고한 화석으로 드러날 아주 오래된 死骸와 같은것이다.
관념에 물들수록
인간은 초라하고 쓸쓸해진다.
마치 그 쓸쓸함과 초라함을 동시에 말해주듯
제 할일을 마친 낡은 목선 두개가 놓여있었다.
긴 사설을 풀어 내듯
뒤 배경이 되는 풍경들이 범삼치 않았다.
돌아가야할 시간때문에 어딘가에 속박된듯한 더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에 쫒기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꿈중의 가장 기분 나쁜 꿈도
시험 시간에 쫒기는 꿈이었다.
시간은 뻘 밑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
내 목을 조여왔다.
나무 그림자가 파충류의 손가락처럼 꼼지락거리며
수면을 어루만지는 동안에도
호수는 죽을 힘을 다해가며 슬픔을 인내했다.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마치 나무 덩걸처럼 세상을 보고 있다는것은
슬픔 이전에 세상에 대한 모독이다.
그런데 미묘한 감촉의 느낌이
이 깊은 고요 속에서 되살아났다.
첫 키스의 추억처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민한 촉감 같은 것이었다.
그 가볍고 미세한 떨림이
순식간에 몸 전체로 퍼져 나가며
완벽한 전율로써 튜닝되었다.
대대제방을 지나 오는 풍경은 예상외로
밋밋하거나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했다.
불구의 새는 요동도 못한 채 붙박이 가구처럼
물에 박혀 고요했다.
간혹 고니나 청둥오리들이 무료함을 끊고
물위를 비상했으나
거대한 적요를 깨트리지는 못했다.
작은돌이라도 하나 주워 그 끔찍한 평화를 향해 팔매질을 하고 싶은
비정상적이 충동이 다 일었다.
그것은 폭력이었고
고요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마늘밭
가을은 여름의 뻘물들을 다 가라앉히고
물은 고요하게 맑아갔다.
늪을 빠져 나온 물은 봄의 개울물처럼 맑았다.
일기 예보와는 반대로 의외로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겨울의 묵은 때를 벗기는 봄날의 기운이 느껴졌다.
한껏 갈증을 해소한 물빛은 늦은 가을 햇살에 더욱
농염하게 반짝거린다.
물빛이 맑아 질수록 가을은 더 무르익는 법이어서
너무 농익어 버려야하는 과일처럼
나는 그 물빛이 싫증났다.
역광에 억새의 관모만 화사한 가운데
물 속에는 마침 주검처럼 생명을 다한 다양한 풍경들이 떠 다녔다.
부동의 새들은
생명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은 죽어가는 채
살아 돌아 온것은 더 큰 삶을 위해 비행을 준비하는듯 했다.
길의 끝이 보였고
지나온 길도 큰 환을 이루며 드러났다.
질풍 노도와 자멸의 시간이 끝이 난것처럼
마음도 풍경과 함께 끝나가고 있었다.
주검이 떠다니는 늪
시간에 갇힌 늪
시간의 그림자로 남은 늪
아름다운것이야말로 슬픈것이다.
비록 이런 생각이 불현듯 되살아 난것이긴 해도
평소 나는 종종 이렇게 생각해 왔고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또한 이런 생각을 했을것이다.
하지만 가을의 우포만큼 아름다움과 슬픔의 비유에
적합한 장소를 나는 일찌기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우포의 아름다움을 슬픈 물빛과 고독한 수직의 나무들에서
애써 찾았다.
그것은 순수한 아름다움이었고
그 순수한 만큼 깊은 애조를 간직한 아름다움이었다.
내 마음의 풍경으로 남은 늪
- 후 기 -
황량한 공간에서는 늘 있기 마련인
외로움이나 고독 따위의 감정을
거리낌없이 반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곳이 있다면
그 곳이야말로 우포다.
우포는 어짜피 시간의 켜가 쌓여 이루어진 곳이니까.
오늘 내가 그랬다.
신들린것처럼 신명나다가도
신명남이 소진되면 또 불현듯 쓸쓸함이 되밀려왔다.
밀물도 쓸물도 없는 뻘 속을
내 마음만 분주히 오고 간것이다.
그 모든 복잡하고 정리되지않은 마음의 상황들이야말로
우포라는 절대 고독의 공간이 만들어 낸 자연의 작위에 불과했다.
우포가 그런 곳이다.
나는 정리되지 못한 감정을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늪의 저변으로 침몰 시킨다.
우포의 땅 밑에 내마음을 순장하듯
이미 늪인,끝을 알 수 없는 마음 하나를
대신 얻어온 그런 하루였다.
파가니니 /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No.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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