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LIMITY
거룩한 풍경이란
인간을 압도하는 이데아다.
기쁨인 동시에 종교적인 감동.
美를 넘어 인간 정신을 숭고하게 고양시키는 힘을 가진다.
뒤로 금수산의 장쾌한 능선이 보이고
그 능선을 병풍삼아
곰보빵처럼 표면이 제멋대로인 가은산이
들끓다 못해 마침내 청풍호반으로 몸을 던진다.
오늘 가야할 산은 바로 저 가은산이었으나
산림방재기간이라 출입이 막혀
부덕이 구담봉 옥순봉 코스로 산행지를 변경하였다.
이날 가은산으로 산행지를 정한 산악팀들이
일제히 호수 건너로 산행지를 옮기는 바람에
산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구담봉 쪽으로 진행하던 후미의 10여명은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 갇혀 꼼짝없이 낙오되었다.
산을 타다 보면 이런 상황쯤은 얼마던지 겪는 일이지만
오늘은 어째 분위기가 좀 돌아갔으면 하는 느낌이었다.
하는수없이 그들을 따라 옥순봉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머지 일행은 이미 봉우리를 넘어 간 상태였다.
무전기를 통해 봉우리를 넘었다는 배아픈 소식들이 전해졌다.
사진을 찍으며 노닥거리다 일행을 보기좋게 놓친셈이다.
전날 내린 비에 하늘의 먼지가 달아난 탓인지
하늘에는 구름 한점없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인간들이야 말로 다 티끌이었고
나는 다만 늦게 등장한 티끌이었다.
수억년전 지표를 이루는 판들이 어코디언처럼 주름을 만들며
이루어 낸 대지의 모양.
오늘은 그 모습이
청풍호반의 옥빛 하늘빛처럼 순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맑고 투명한 날.
몸과 마음 또한 보석처럼 투명해
세상은 한없이 맑은 blue로 마름해가는 느낌이었다.
사진을 통해 시야를 재단하는 일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즐겁다.
아름다움이 그대로 품속에 들어와
마음을 장식한다.
작고 소담스럽기만한 풍경이다.
좌측 말목산과 우측 제비봉 사이로
흰눈이 신령스럽게 쌓인 소백산의 연화봉이 보인다.
하얗게 반짝이는 소백산의 영험하고 거룩한 원경이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근경에 대비되어
마음에 묵직한 추를 단듯 달뜬 마음을 숙연하게했다.
숭고함이란 저런 풍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산에대한 끝없는 경외감.
마음이 차분해진다.
멀리 마테호른 처럼 뾰족한 봉우리를 자랑하는 월악산 능선이보인다.
여기는 월악산 국립공원 구간이다.
국립공원을 넓게 잡아 관리하는것은
환경 보호 차원에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지키지도 못할 만큼 넓은 면적을 공원으로 잡고서는
걸핏하면 출입을 통제시키는 행정력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다.
영롱한 물빛에 바람이 살랑인다.
음악이 살아난다.
마음의 글들이 나비처럼 일어나 물위를 날아간다.
쇼팽의 왈츠처럼 풍경이 감미롭다.
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감미롭고 고요한 곡을 골라
마치 꽃이 등장하고 비둘기가 등장하는 마술처럼
음악을 물결 위에 풀어 놓는다.
이렇게 감미로운 순간
음악이 나를 위해 기다려준다는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거칠것 없는 이 자유.
나는 한마리 산천어가 되어
신명나게 지느러미를 흔들며
재빨리 물속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을 다 보내고 나는 혼자 놀기에 여념이 없다.
일행과 떨어져 나는 끼니를 포기하고 혼자 산길을 즐긴다.
훨씬 가벼워진 나를 느낀다.
투명한 하늘을 뚫고 늦은 가을 햇살이 사과에 마지막
단맛을 올리듯 따갑게 내려 쬔다.
내가 익는다.
그야말로 익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풍경 끝에 달린 물고기처럼 마냥 신바람이 났다.
딸랑 딸랑 소리를 내며 풍경이 놀고있다.
1987년 소련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인 요셉 브로드스키는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백해무익하다하여
사회주의 기생충이란 죄목으로 5년간 시베리아 귀향을 살게되었는데
그를 재판한 재판관은 브로드스키에게 왜 일을 하지 않았느냐고 질타했다.
그러자 그는 일을 했다고 대답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나는 시를 썼습니다.
아무도 너의 시를 읽지 않는데 누가 너를 시인으로 인정했는가.
누가 당신을 시인에 포함시켰소?
브로드스키는 재판관에게 되물었다.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을까?
첫사랑 여인의 서글픈 눈처럼 거칠것 없이 맑은 호수를 바라보며
나는 인간이 아니라 물고기에 포함된 기분이 들었다.
내 의식이 잠들었던적도 있었을까.
의식이 氷原처럼 명징하다.
투명한 눈을 가진 회유어처럼 나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시간이 흐르는 물처럼 숨가쁘게 지나간다.
인간의 삶이란것도 결국 물고기를 품고있는 물처럼
시간에 저항하는 보이지 않은 매질이 아닐까.
그 매질이 때로는 경쾌하고 때로는 무겁디 무거운 것이라면
지금의 내 삶은 분명 한없이 가벼워 한치의 저항조차 느낄 수 없는
감미로운 바람에 불과하다.
나는 인간이다.
스스로 당당한 인간이다.
깨닫음을 얻는것과
그렇지 않는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안다.
삶을 바라보는 눈이 변했다는것을.
산이 내 마음에 들어선 순간
세상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했다.
千經萬論을 바람소리라 일갈했던
그날 이후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성공에 덜 집착하게되고
지금의 가치를 더 절실히 깨닫았다.
현재의 소중함
지금 느낌에 충실함.
마치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나는 치열하게
나아간다.
쉽게 주어지는것이 아니기에
나는 맑은 눈을 부릅뜨고
저 아름다운 능선 너머를 향해
의식의 큰 바퀴를 굴려가며
나는 달려간다.
지금을 향해.
아름다운 월악산의 능선
가을은 털고 지나가는것인데..
가지는 몸을 닫아
나뭇잎을 떨구어 내고
나뭇잎들은 비로소 제 빛을 찾아가는것이 가을인데
그 빛 마저 설핏한 가을.
강 너머의 세상은 무덤처럼 얌전하고
훨씬 단순해진 풍경들은 근원을 예시하는듯 평화로운데
나는 내 삶의 시한들을 손가락 꺽어가며 가늠한다.
아직 남아있는 시간의 여유가 느껴진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나보다.
낙타등 모양의 구담봉
잘 영글은 메주콩을 삶아
메주를 담을 때
그 은근한 콩 냄새 속에서
먼 훗날의 미각을 예감하듯
나는 잘 익어가는 가을의 호수에서
내 삶을 또한 예지한다.
호수는 나를 비추어 보는 거울이다.
한없이 무의식의 우물을 향해
내려갔던 지난 날
나는 마침내 그 끝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떠오른다.
수면을 향해
붉은 아가미를 벌럼거리며 떠오르는 물고기처럼.
물의 향기가 느껴진다
진한 삶의 향기이다.
잘익은 상처에서 꽃 향기가 나듯
켜켜히 주름잡힌 삶 속에서도
배꽃 향기가 난다.
마주보는 것이던
서로 같은 방향으로 함께 바라보는것이던
우리가 함께했던 농익은 시간.
바로 지금의 시간이
그대로 축복이요 기적인 까닭에.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않았다.
나와 함께 늙어가자
아직 최고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인생의 후반, 그것을 위해 인생의 전반이 존재하나니
-브라우닝-
새로 입힌 이불 호청에서는
맑은 햇살의 냄새가 베어있다.
스르르 눈을 감게하는
숙면의 유도체.
호청을 빨아 말리고
다듬질을 하고
발로 꼭꼭 밟은 뒤 사죽이 틀어지지 않게 서로 밀고 당기기를 여러번
어머니의 꼼꼼한 바느질이 있고서야
비로소 이불이 탄생한다.
그 이불 호청에서 나는 그 상큼한 느낌 그대로
청풍호반의 바람 또한 상쾌하다
스스로 잠이드는 잠자리처럼.
옥순대교
최고의 절경
구담봉에서 옥순봉에 이르는 짦은 구간동안
나는 몇번이나 사진을 찍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보면
설악 공룡의 스케일도 아니고
천지의 가슴 시린 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풍경은 그 자체로도 시와 종교를 잉태한듯했다.
저 멀리 소백산으로 부터 전승된 숭고함이
거대한 사태를 이루며 밀려와
나를 역광에 분분한 먼지로 느끼게했다.
유쾌하면서도 사람을 도취시키는
묘한 마력이 나를 언제까지나 붙들어 맬 기세였다.
사진은 세상을 확대시킬수도 축소 시킬수도 있다.
유약함 으로부터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숭고함은 작고 유약한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구담봉과 옥순봉의 풍경은
가슴에 쏙 들어오는 삼할 삼푼의 사랑처럼 소담스럽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인간의 미약함을 느끼게 하기에는 거세된 소처럼 스케일이 좀 작아 보인다.
오히려
저 멀리 보이는 소백의 우련하고 장대한 능선이야말로
숭고하다고 할 수 있다.
광대하고,공허하며 어둡고 균일하며 연속적인 이미지
이런 인간의 감성을 압도하는 이미지가 없기에
지금 내 눈 앞의 풍경은 아름답기만한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스케일을 느끼며
그 기운에 압도되기 위해서는
풍경을 가까이 당겨서 보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의 가치가 숭고해지는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대로
어늑한 숭고함은 그리움 그대로 간직함이 옿다.
억새
세상 모든 가을 바람은 억새풀을 스쳐 지나가는 까닭에
그 윤기나던 머리결도
늙은 할머니의 머리카락처럼 하얗게 보풀이 이는구나.
내 마른 손처럼 가을은 여위어 가고
마음 또한 억새와 같아
원망으로 보풀지던 지난날.
이렇게 우리 깊은 상처로 만나 햇살을 나누니
늙는다는것이 꼭 외로움만은 아니구나.
- 후 기-
풍경에 달린 물고기처럼
깨어있는 느낌이 좋은 하루였다.
산길에 오르는 순간 나는 깨어 난다.
물고기처럼 부릅 뜬 눈으로
나는 세상을 본다.
산은 내 마음으로 통하는 부루클린.
풍경을 꿰뚫고 지나가는 내 눈빛에
힘이 느껴진다.
공작의 깃털처럼 풍경의 끄트머리가 선예하다.
며칠이 걸릴 일을 한꺼번에 해내버린것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쇼팽 : 왈츠 제9번, A플랫장조 Op.69 No.1 '이별의 왈츠'
'마음으로 오르는 산 >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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