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오르는 산/산행

가지산

poll™ 2009. 1. 26. 14:42

 

 

 

 

 

산은 삶을 느끼기 위한 것일까.

삶을 생각하기 위한 것일까.

'느낌'과 '생각'의 간극이 문득 궁금하다.

 

 

 

 

 

 

 

 

 

 

 

 

가지산은 지리산 다음으로 늘 오르고 싶은 산이었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산을 오르면서

유독 가지산이 뒷전으로 밀린 까닭은

가지산은 겨울산 즉 겨울철 산행에 적합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동안 가지산과 이웃한 백운산이나 상운산, 운문산을 넘나들면서도

가지산은 여전히 언젠가는 넘어야할 산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할 산으로 남아있었다.

 

 

 

 

 

 올 겨울 최고 추위를 알리는 일기예보를 뒤로하고

가지산을 올랐다.

산정에서 만날 고추냉이와 같은 매서운 바람을 기대하며

온갖 대비를 다 하였건만

생각외로 날씨는 아주 산행에 쾌적한 날씨였다.

 

석남사에서 시작해 다시 원점 회귀하는 산행로는

여타 가지산 등로에 비해

그다지 인기있는 등산로는 아니다.

그기다 설을 하루 앞둔 때라

산은 적막하리 만큼 인적이 더물었다.

 

 

 

 

 

 

나는 산행을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

즉 산행을 통해

평소 무신경하게 살았던 지난 시간들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조용히 산을 음미하고

느끼고,비유하면서

산은 사색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교훈적 공간이라기보다는

내 몸의 유기적 흐름을 감지하게해 주는 느낌의 장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가지게되었다.

 

 

 

 

 

 

 

산행을 통해 얻는 느낌이란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존재론적 문제가 아닌 필요 조건

즉 세상을 더 잘 느끼고

그 느낌이 삶에 풍미를 더해주는

 조미료와도 같은것이리라 생각된다. 

 

  

 

 

 그 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불가피하게 얻을수 밖에 없었던

원체험적 상처들을

산행을 통해 스스로 그 상처와 대면하게 하고 

그것을 위로함으로써

나는 보다 새로운 삶의 지향점을 가지게 된다.

 

 

 

 

고도 400m지점에 이르자 멋진 낙엽송 군락이 나타났다.

낙엽송 숲은 높고 깊다.

나무와 나무의 틈  사이에서 하늘의 조각들을 본다.

얼마나 맑고 부드러운가.

푸른 하늘 몇 조각 가슴에 푹 집어넣고

나는 다시 가벼워진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산행은 의지의 집약이다.

비자발적 던져짐이 아니다.

나 스스로 치유하고 고쳐나가는 것이기에

새로운 탄생에 가깝다.

자기 회고를 통한 자발적 정체성의 확보라 할 수 있다. 

너무 어려운가?

 

 

 

 

 

 

 

 

 

 

 

 산비알의 흙이 다 붉다.

지난 한 해 타다만 잎들이다.

 

겨우내 썩다 말다

마침내 검은 흙이 되리라.

 

땀을 주어 익힌 대지 위에

이렇게 적색의 잎들이 잊혀져 가는  동안

 

아직은

촛불처럼 남은 이 환한 기억들을

 

나는 사랑이라 부를까

슬픔이라 또 부르게 될까.

 

 

 

600m 정도의 고도에서 갑자기 찬바람을 만난다.

신기하다.

어디서 이 바람이 불어오는지.

더워진 머리가 다 맑아진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가볍다. 

 

 

 

 

 

 

고도 800m 부근서 부터 60도 가까이 되는 급 경사를 이루며

산은 가파르게 고도를 밀어 올린다. 

 

고통이 극복해야만할 예고적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래야만 인생을 넘어서기 쉽고

그것이 일상화 될 때 삶이 더 진지해 지는것이 아닐까. 

산은 이렇게 고통과 움직임을 통해 생각을,

그리고 생각을 통해 삶을 살찌운다.

 

 

 

 

 

 

 

 

 

 

 

잔설이 남아있는

 가지산 주봉과 중봉

 

 

 

가지산은 영남 알프스의 제일봉으로서

낙동정맥의 중심이다.

여기서 부터

영축 정맥인 간월산,신불산, 영축산줄기가 뻗어나가고

운문정맥인 백운산,운문산,억산 등이 뻗어 나간다. 

 

 

 

 

 

 

 

산은 무한한 감각의 근원이다.

느낄수 없는 나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더 느낀다는것은 살아있는 자의 축복이요 생명수와 같은것이다. 

그것은 삶 이전의 양식, 

삶이 삶다울 수 있게 하는 존재적 가치이다.

 

 

 

 

 

 

 

 

 

 

 

 

 

 

쌀바위 

 

 

 

 

 

 

 

 

 

 쌀바위 아래 작은 산장이 있고

꽁지 머리에 수염을 기른 산지기가

개 한마리와 살고 있었다.

개는 풍산개. 아직은 귀엽고 선해 보이는 강아지다.

옥천에서 왔단다.

 

"지난 번 개는 어떻게 되었어요? " 누가 묻는다.

"잃어 버렸어요."

"사람을 따라 갔나봐요.'

'어림없는 말씀"

"바깥에 잠시 메어 뒀는데 어떤 도둑놈이 줄 채 훔쳐갔어요."

"짖지 않는 개니까."

"벌써 스무마리도 넘게 잃어버린걸요."

'매번 같은 놈이 훔쳐가는것 같아요."

"한번은 석남사 스님이 찾아 준적도 있어요. 저희집 개를 아시니까"

 

가지산에 와서 개를 훔쳐가는 놈.

개를 훔치러 이 먼 산까지 올라오는 그 놈,놈,놈.

 

 

 

 

문득 삶에 대해 필사적으로 고뇌해 본 적이 있는가하고

스스로 자문한다.

나의 삶이 극적이지 못한 관계로

이런 극적인 삶에대한 사유의 필요성을 나는 사실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나 필사적이란 극한적 장치를 두고보니

삶에 대한 콘트라스트를 어렴풋이 느낄수 있을것도 같다.

어쩌면 삶의 질곡이 없어서라기 보다도

고난을 골치아픈것이 아닌

삶의 일부로 여겨버리는 나의 타고난 성정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봉에서 석남터널 방향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

 

나는 지난 세월동안

하늘이 내가 극복할만큼의 고통을 주신것에 감사한다.

앞으로 남은 세월 또한 이런 관념을 통해

고난의 파도를 헤쳐나갈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한편으로는 두렵기도하다.

누가 알겠나 인간의 운명을. 

나는 그 시험이 두렵다.

 

 

 

석남사 방향으로 이어지는 계곡

이전에는 여기가 태화강의 발원지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백운산 탁골샘으로 밝혀졌다. 

 

 

내게 산행은 고행을 나누어 갖는 일종의 예비체험이다.

그래서 산행은 언제나 인생의 비유이며

삶의 연장인것이다.

 

 

 

 

 

 

 

 

멀리 울산쪽 조망 

 

 고통이 없는 삶.

고통을 모르는 삶.

예비하지 못한 삶.

그런 안이함에대한 경종을

나는 매번 산행을 통해 듣는다.

 

 

 

 

 

 

중봉

중봉너머 보여야할 재약산의 모습은 박무에 지워져 희미하다. 

 

 

산에서 나는 매번 깨어난다.

산에서 만나는 자각이

시원한 목욕처럼 기분좋다.

오감이 살아나고

생각이 생각을 흔들어 깨운다.

삶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방향을 틀어 올라가자

우측으로  재약산이 보이고 좌측 멀리에

문수산과 남암산이 대칭으로 보인다. 

 

 

 

 

 

 

 

 

 

정상에서 바라 본 쌀바위

쌀바위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낙동 정맥이다. 

쌀바위 뒤로 상운산이 보이고

그 뒤로 능선은 문복산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느낌이 주관적인것이긴 해도

결국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밑거름이다.

느낌이 있는 생각이 감각적이긴해도

삶은 더 풍요로와 질것이다.

좋은 느낌은 가질려 애쓰기 보다는

발견을 통해 얻는 수가 많다.

그래서 나는 초행길을 사랑한다.

 

 

 

 

 

 

 

 

 

 

 

 

 

 

 

 

 

 

 

 

 

 

 

 

 

가지산 정상에서 바라본 백운산과

백운산 뒤로 재약산이 보인다. 

 

 

 길은 사유의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사유의 방아쇠를 당기는것은

느낌이다.

왜냐

나는 생각을 작정 하고 걷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왜 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생각의 결과는 즐겁다.

행복하다.

 

 

 

 

 

 나는 사유를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거나

추론을 얻고자하는것은 아니다.

사유는 사포질과 같은것이다.

 

닦아 내고 갉아 내어

맑고 부드러운것에 서서히 도달하는것.

본질에 이르는것.

도달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이 긴 과정을 통해 새로움을 얻는것.

이것이 山의 묘미요,

行의 즐거움이다.

 

 

 

 

 

 

 

웅장한 맛이 일품인 운문산

운문산 뒤로 억산이 보인다.

 

 

 

 

 

 

 

 

 

 

 

 

 

 

 

 산정에 오르는것은 늘 조심스럽다.

그러나 산정에 가까와 질수록 얼른 오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은 언제나 다급하다.

급한 마음을 느린 발걸음으로 가다듬는다.

이럴 때는 음악이 제일이다.

마음 속을 뒤져 한 줄 소리를 애써 꺼낸다.

소리와 소리가 이어지며

어느새 한곡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가지산 정상을 바라보며

내가 선곡한 음악이다.

느린 音들이 스산한 바람처럼 다가온다.

음이 나를 조용히 밀어 올리듯

산을 오를 수록 정신이 고양된다.

현과 현 사이를 나는 음표가 되어 걷는다.

얼마나 멋진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봉 넘어

 문수산 남암산 의 쌍둥이처럼 귀여운 자태.

 

 

 

 

 

 

 가지산 주 능선

우측으로 상운산, 문복산으로 이어지고

좌로 백운산을 지나 운문산으로 이어진다.

이 능선을 가지산 남릉( 진달래 능선)이라고 하고

이 계곡이 용수골이다.

백운산 아래 유명한 호박소가 있고

그 아래에서 쇠점골 계곡수와 합류한다.

 

 

 

 

진달래 능선의 유려한 모습

주름치마를 펼쳐 논것 같다.

 

 

 

 

운문지맥 능선상의 바위들

 

 

 

 

 

 

산에 오르면 내려가기가 싫고

내려가면

오래 머물렀던 시간들이 다 그립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저녁을 재촉한다.

우리는 벌써 산을 내려갔어야 할 시간임에도

여전히 산중에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때문이다.

 하산 길은 늘 이렇게 아쉽다.

 

 

 

 

어머니 왜 날 이 땅에 낳으셨나요 

저 구름 위에

나무 가지 위에 날 낳지 않으셨나요.

 

이 초자연적인 싯귀를 자꾸 떠올리게하는 구름이다.

구름과 하늘에 자꾸 눈이 간다.

 

 

 

 

이 나무 터널을 지나면

인 내가 치이로가 되 버릴것 같다. 

 

 

 

 

 

 쌀바위에서 상운산으로 이어지는 주 능선.

 

 

 

 

 

 

마치 칼자국처럼 산을 베어 임도를 만들었다.

산의 생채기에 내 맘이 다 아프다.

상처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구름이 하나 경쾌하게 솟구친다. 

 

 

 

 

 

 

 

 

 

 

 

마사토 위의 소나무 모습이

마치 한지 위에 그린 동양화처럼 멋지다.

이런 질감과 색이라면

어떤 대비도 아름다울것 같다.

맛갈스런 빛,

 늦은 하오의 은은함이 어느새 온 천지를 가득 메운다.

빛은 나를 붙잡고 시간은 자꾸 나를 내려가라 떠민다.

 

 

 

 

 

 

 

 

 

 

 

 

 

 

 

 

 

 

 

 

 

 

 

 

 

 

 

 

 

 

 

 

 

 

 

 

-후 기- 

 

 가지산에 다녀 온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않다.

마음 속 깊이 꽁꽁 숨겨 둔 비밀처럼

혼자 이 기분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이런 은밀함 조차 즐겁다.

너무나 좋아 꼭 숨겨두고

야금 야금 시간 날 때 마다

꺼내 보고 싶은

가지산은 그런 산이었다.

 

 

 

 

 

 

 

 

 

 

 
 
 
 
Pietro Mascani 마스카니 - Cavalleria Rusticana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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