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만의 강 추위가 도래했다.
나는 여지껏 영하 20도라는 추위를 일찍 경험한 바 없거니와
이 추위가 동해의 제대로 벼루어진 바람을 만날 때
일어 날 뼈 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의 실체를
눈치 조차 채지 못했다.
그만큼 추위는 다급하고 황당했다.
그러나 그만큼 신선한 체험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강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전국 각지에서 태백산 눈산행을 체험하기위해
산길을 메울 만큼 많은 인파가 붐볐다.
한국 사람 극성이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국인의 저력을 느꼈다.
산악국 코리아!!
한 떼의 사람이 지나간다
그것은 시베리아행 열차이다.
순백의 평원
끝없는 자작나무 숲
아! 관능과 슬픔의 라라.
방기한 자유
눈물 마른 詩.
사람 붐비는 길 한켠
빗겨 선 낙엽송 숲이 고요하다.
깊이를 알수 없는 침묵의 강물이 흐른다.
흰 물결 위에 떠다니는
겨울 그림자 위로
뜻밖의 정화가 느껴진다.
낯선 감동이다.
세상의 모든 감동은 원초적으로 낯선 걸까.
나는 내 소중한것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가벼운 두려움으로
흰 눈밭 위를 걸어 본다.
첫 발자국 부터 깊이 빠져든다.
처음은 이렇게 늘 두렵다.
영하의 세찬 추위를 이기며
산을 오르는 일 역시
두렵고도 낯선 일이다.
처음 만나는 주목 나무.
마침내 반도의 등줄기가 떠오른다.
삐줏 삐줏 비늘이 선다.
오호라 거룩함이여
이 땅의 대지여.
꿈이여
희망이여!!
함백산의 위용
함백산과 매봉산 너머 시원한 동해 바다가 일행을 반긴다.
살을 에는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 온다.
사진이고 뭐고 정신이 하나없다.
바람이 바람으로서
바람을 맞으라 강요한다.
예고 없는 전쟁처럼
온 몸으로 바람을 견딘다.
마스크에서 올라오는 김때문에
안경에 낀 서리가 금방 얼어 성애가 되어버린다.
앞을 볼 수 없다.
앞을 볼 수 없으니 사진이고 뭐고 없다.
장갑 밖으로 손가락을 내면 금방 손가락이 얼어버린다.
무딘 감각으로 대충 몇장 사진을 찍는다
손끝이 아리다.
동해의 칼바람
벼룰대로 벼루어진
면도날처럼 예리한 칼날을 가진 바람.
바람에 살을 베인다
마르고 아픈 상처이다.
이 얇은 공포인 바람이 빗질을 하듯
살을 마구 찟는다.
설명할수 없는 공포이다.
설명할 수 없다는것도 일종의 자랑거리인지
고통을 얼른 상상의 상단에 올려두고 우쭐거린다.
그래 나는 최고의 추위를 받아 태백산에 올랐다.
천제단에 나아가
작은 소원이나마 하나는 빌 자격을 얻었다.
소원을 빌수 있을만큼 나는 충분한 고통을 감수 했다고 자임한다.
마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소원이 쉬 이루어지리라 착각하는
수도자처럼
자학에 가까운 견디기였다.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성취감은 크다.
살아있는 나무는 살아있는 대로
죽은 나무는 죽은 채
바람을 이겨내는 방법을 안다.
서슬푸른 바람에도
산들은 잘 다듬어진 남자처럼 건강해 보인다.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땅의 모든 백성들은 다 거룩하다.
세상의 복록이
이 거룩한 극복에서 나온다.
제단 위의 돌 세개
서북 쪽 하늘은 아직 가시지 않은 뿌연 박무로 자욱하다.
이 바람으로도 걷어갈 수 없는
물기란 어떤것일까.
박무는 박무인 채 갇혀 거대한 얼음 공기가 되어버린것 같다.
머리에 흐른 땀이 얼어버려
얼음 모자를 쓰고 있는 기분이다.
찬 기운이 머리에서 등뼈를 타고 내려 꽂힌다.
추위가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이 되어버린 추위.
일행과 떨어져 걷고있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할 지 솔직히 난감하다.
태백산 천제단은 신의 나라
신의 입김이 거칠다.
태백은 신령스런 산이기에
太자를 머리에 달았다.
그러나 정작 태백을 오르는 이는 인파에 휩쓸려 태백의 신령스러움을 모른다.
태백의 제대로 된 바람을 맞고서야
태백을 비로소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주위를 돌아 본다
주위의 산세를 통해 태백의 지위를 가늠한다.
주위 산들 위로
빼어남을 자랑하며 우뚝 선산.
산들의 산.
자신을 통해 세계를 보는것이 아니라
세계를 통해 자신을 깨닫아야한다는
정신을 되세겨 주는것 같다
겨울 눈길을 걸으며
마치 흰 도화지 위의 소묘를 보듯
풍경을 하나 하나 담아나간다.
흰색 여백이 주는 평화가 좋다.
차분한 상상이
풍경을 배경삼아 커져간다.
한나절의 고통의 보답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풍선에 애써 바람을 넣어 부풀리듯
점점 커져 가는 마음이
하늘을 담아 둔듯 가볍다.
마침내 그 가벼움은 희박한 공기처럼
엷어져
나는 꽉 찬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된다.
육산의 능선금이 유연하게 이어진다.
무덤덤히 사라지는 산금 꼬리에 고독이 달려있다.
태백이야 말로 우직하게 견뎌 온 이 민족의 심성을 묘하게 상징하는지
두터운 두께의 역사가 도도하다.
한이 없는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세월이 묵어가면 다 한이 되는것이다.
저 처럼 푸른 빛의 세월이 아련하기에
靑史라 일컫는게 아닐까.
산처럼 푸르게 살고 산처럼 푸르게 사라진다.
푸른 역사.
산처럼 푸른 역사의 삶을 살고 싶다.
역시 인산 인해의 산정.
이별의 정거장이다.
여기서 부터 나는 인파와 이별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길로 하산하기 때문이다.
해방이다.
사색의 자유를 얻는다.
세상과 세상을 경계하는 선예한 끝에 다다랐다.
그기에 맞춘듯 바람 또한 날이 섰다.
세상의 끝.
저 너머의 세상은 또 별개의 세상릴까.
지혜가 머문다는 서역.
세상의 모든것이 돌아가는 곳.
아직 내가 속한 세상이 아니다.
서쪽 하늘을 보며
세상이 나와 다르되
나와 또한 크게 다를것이 없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자
세상이
화엄의 꽃봉오리처럼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法이 움직임없이 고요하다.
이름도 모양도 없는 세상에
분별마저 없이 생각이 개운한 국처럼 맑아진다.
ㄱ자로 유연하게 이어지는 문수봉 가는 능선
게으른 봄 누에처럼 한가롭다.
그 많던 사람들은 사라진 싱아처럼 어디론가 간곳 없고
태백의 농익은 적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눈밭에 뛰어들듯 결빙된 세상을 향해 뛰어든다.
미처 해동되지 않은 홍시를 베어먹은듯
차가운 몸이 더 시리게 느껴졌다.
나는 그 기분 좋은 알싸함을
놓치기 싫어 깡충거리며 눈밭을 뛰어간다.
앓던 이를 빼어 버린 뒤의 시원함이 뒤따라 왔다.
저 큰 세상을
한 줌의 눈처럼 뭉쳐
한 뼘 시야에 담아두고 싶다.
줄여 진 세상에 놓인 마음이 편안하다.
산들이 한아름으로 가슴에 안긴다.
가슴에 꽉 차오르는 사랑같다.
삼할 오푼이면 족하다는
바로 그 사랑같다.
거제수 나무, 사스레나무만 고요한 겨울 숲을 지킨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에 고독이 흠씬 묻어나온다.
가공 되지 않은 소리다.
소리들이 흰 눈에 씻어져 투명하다.
정화된 세상의 빗장을 풀듯
삐걱거리며
오후의 숲을 헤쳐나간다.
소리에 내가 하나된다.
은빛 우듬지가 눈부시다.
장대한 태백 준령의 근골을 마침내 가까이 마주하니
묘한 흥분을 일으킨다.
제대로 기상을 받은듯 추위로 지친 피로의 기색이 달아난다.
건강한 에너지다.
힘이 살아난다.
펄펄 되살아난다.
생뚱맞게 이지러져가는 하현에 가가운 달이
동해 바다 높이 떠 있다.
한조각 달이 밤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사랑의 곡절들이 이별을 예고하듯
다가올 밤을 다만 예고 하는것이다.
그러다고는 해도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위에
푸름을 배경으로한 배불뚝이 달.
세상 무엇도 어울릴것 같지 않은 달이다.
제 스스로 나왔거나
혹은 쫒겨난 채 하릴없이 서성이는
그런 어색한 행색의 달이다.
길은 유기체다
길은 길이 가지는 고정된 통일성과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긴장성 위에 놓여있다.
길은 끊임 없이 확장되고 다져진다.
그렇지 않는 길들은 소멸되기도 한다.
성장과 쇠퇴를 되풀이 한다는 점에서
길은 이렇게 유기체의 특성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길 위에서는 살아있는자의 역동적 에너지가 느껴진다.
슬픔이 느껴지고
기쁨과 희망이 느껴진다.
마침내 삶이 느껴진다.
강원도 산의 끝은 늘 낙엽송 숲이라 좋다.
산행을 정리 하는 기분으로
카밀 생상의 3번 교향곡 오르간을 떠올린다.
웅 하며 깊고 높은 진동음이 귓가에 사무친다.
장송과 찬미로 분화한 이중 이미지가
숲길 가득 넘친다
나는 그 음악의 길 위를 꿈꾸듯 나아갈 뿐이다.
눈 축제가 준비 중인 날머리 당골이 가까왔다.
비로소 현세다.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산행은 기도 같았다.
기도가 통하였는지는 모르되 묵직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기분좋은 평화였다.
- 후 기-
즐겁다는것은
마음이 안정된 후의 평화와 같은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군자의 파격처럼
그 잔잔한 마음의 평화에
파문을 일으키듯
흥분된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산행이 있다.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첫 경험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이런 즐거움의 파장은 오래간다.
생의 긴 길 위에 샘물이되고
추억이 된다.
태백산 칼바람을 이기며
돌아 온 길이 그런 길이었다.
즐겁고 건강한 체험이었다.
09. Northern Lights - Brian C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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