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월산과 신불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이 행복해 보이는것은
그저 스쳐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기욤 뮈소-
시산제를 올린 능동산 정상부
능동산에는 세번 올랐다.
그러나
오늘에야 비로소 능동산을 보게되었다.
산을 본다는것은 자신을 돌아보는것과 유사하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듯
능동산의 이웃한 산들을 통해 현재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이다.
이전에 내가 올랐던 능동산길은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빗길이었거나
혹은 야간 산행 중의 어두운 밤길이었다.
사위가 닫힌 답답한 뒷마당 같은 좁은 공간을
정거장처럼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오늘 능동산의 의미는 남다르다.
山心을 上氣시키는 너그러운 그리움의 근원,
산정한 향한 묘한 집념의 들머리와 같은 그런 느낌의 산이었다.
-펌- 볼수록 신묘한 산거북님 제작 지도
신불산과 우측으로 이어지는 영축지맥
간월산 너머 신불산이 멋진 위용을 자랑하며 솟아있다.
그 옆으로 안데스 콘돌의 一翼처럼 영축지맥이 펼쳐진다.
나는 한때 배내고개에서 배내봉을 지나 간월산 간월재에서 비박을하고
저 영축지맥을 따라
산금에 걸린 모든 산들을 주파한 경험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겁없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분명 나를 키워준 산들이다.
나는 산을 통해 꿈을 얻었고
스파르타의 군인처럼 용맹해졌다.
쉰을 넘긴 나이에 새로운 꿈을 가진다는것은
도전 이전에 행운이다.
지금 벅찬 감회로
그 장대한 꿈의 능선을 마주하고있다.
옛일이 파리지옥처럼 나를 옭아맨다.
신불산,신불산,신불산
봄을 시샘하는 꽃샘 바람이 불었다.
산에서 내려와 한 아이를 삼켜버린
한서린 바람같았다.
그러나 그 바람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불확실성이 하나 둘 걷혀져 나가는듯했고
큰 슬픔으로 인해 인간의 의식이 성장하듯
날카로운 바람의 떨림으로 풍경에 긴장이 더해졌다.
사무치는 감동이란 이런것일까
수없이 영남 알프스의 제산들을 오르내려도
풍경을 오늘처럼 압도적인 감동으로 받아들인적은 더물었다.
영남 알프스의 산들은 정말 넘어야만 할 산이요
이력이며 숙제와도같은 존재였다.
매번 산을 오를 때마다
산이 감동을 준것은 사실이지만
그중의 일부는 내가 고통을 이겨낸 극기의 감동이었다.
그러나 오늘
나는 풍경 자체가 주는 오롯한 감동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있다.
다시 읽은 책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듯
산들을 조용히 품평하며
열전을 쓰듯 산의 새로운 면목을 그린다.
신불산은 피할수 없는 위엄이다.
혼자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는 절실함이요
세상 모든 산을 향한 애끓음이었다.
산들이 많다.
나는 세상 풍경을 통해 행복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아간다.
풍경을 통한 자문 자답.
미리 작성한 유언처럼
내가 산을 통해 얻은 답들이
내 삶의 충실한 기초이기를.
不動의 믿음이기를 기도한다.
보통의 글들이 스스로에게 주는 감동만큼
느리고 완만한 능선 위에 신불산이 신령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신불산 너머 영취산에 이르는
신불재의 그윽하고 우련한 능선을 수없이 떠올렸다.
기억을 떠올리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이른 봄의 安泰
산을 향한 관조와 사색
과거와 현재의 중앙역과도 같았던 신불 평원.
그곳은 내 무의식의 서늘한 그늘이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영롱한 피아니즘이었다.
바람이 불었으나
기어이 지불해야할 삶의 기회비용이라 여겼다.
기꺼운 바람
생의 마지막을 위에 바치는 레퀴이엠처럼
맑게 정돈된 바람이었다.
바람은 계곡과 계곡을 넘나들며
풍경을 더 맑고 견고하게 만들었다.
투명한 풍경 앞에 눈을 시리게 할만큼
정제된 고요가 문득 찾아들었다.
평화스러운 햇살과
막 따낸 과일과 같은 싱그러움.
눈을 감은 채 만나는
비발디였다.
산정에 평화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내 행복의 지향점이 매 발걸음 마다에 놓여있다는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순수를 향해 나아가는 路程.
어딘가로 다가갈수록 더 크져가는 행복을 느꼈다.
서서히 가슴에 차오르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가슴에 꽉 차올라 벅차 터질것만같은
충만감이었다.
고혹의 하늘길 위에서
주체할수없는 감성의 폭풍우를 만났다.
산을 느낄 수있게한 내 과거의 고난들이
성경 속 고난처럼 감사와 은혜로 되돌아왔다.
산이 되어버린것 같은 즐거움.
행복에의 수없는 담금질.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않는 이기적 기분이요
은유로도 설명할 수없는 기쁨이었다.
가지산과 중봉
하얀 암릉의 백운산, 그 뒤가 운문산
아주 멀리 좌측 끝이 억산.
운문지맥의 제 산들이다.
영남 알프스는 위의 지도처럼 배내고개를 중심으로 바람개비처럼
능선이 교차하며 이어진다.
운문지맥은 배내고개를 통해 영축지맥과 이어지는
또 하나의 지맥이다.
나는 이 능선을 따라 길을걸어
억산 너머 구만산까지 이어지는 산행을 한 바 있다.
이 역시 나를 성장 시킨 길이다.
영남 알프스의 종주가 없었다면
오늘의 산행도 없다.
모든 설레임의 시초요 모태가 되어준 산길이다.
백운산 너머 운문산과 억산으로 이어지는 운문지맥
백운산 너머 호박소로 내려가던 길 또한
산행 초반에 나를 무척 힘들게 했던 길이다.
걸음이 늦었던 나는 길을 잃어 산길을 수도없이 헤메었고
매번 동료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다시 걸었고
그 염치없는 배짱만큼 강해졌다.
하얀 암능에 겨우 비집고 앉아
잘 마시지도 못하는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새로 생긴 터널을 바라보던 시절.
내 산행의 프롤로그다
나 홀로 길을 걸으며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던 지난날
지금도 그 마음 하나 달라진것 없지만
그 날에 비해 나는 정말 강해졌을까.
강해진다는것은
산에대한 열망이지 근력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나는 궁극적으로 산이 법당이요 회당이기를 바란다.
산을 통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심신의 고양.
내 희망이요 꿈이다.
재약산 사자봉
표충사를 통해 사자봉에 오르기도 하고
배내골을 통해서도 재약산에 오른바 있지만
능동산을 지나 사자봉에 오르기는 처음이다.
왜 진작 이 코스를 타 보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두번의 종주가 있고 난 후 영남 알프스에대한
흥미가 시들해진것은 사실이다.
아마 영남 알프스를 마음 속으로
평정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인간이 희망봉을 돌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듯
산 너머의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산들을 향해
비로소 눈뜨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늘 영남 알프스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된다.
새로운 영감을 얻고
새로운 길에 대한 열망이 고조된다.
24번 국도
당도 높은 늦가을 사과를 선사하는
밀양 꿀사과 산지.
어느해 가을 저 길을 따라 창녕을 지나 우포로 놀러간 기억이 있다.
그때 길가에 널린 가야 고분과
일체 침탈의 역사를 또한 보았다.
어쨌던 느낌이 있었던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라이더들이 행열을 만들며 달려가듯
기억이 빠른 속도로 달아났다.
저 가지산의 능선 또한 추억의 산실이다.
이른 아침 가지산 정상부근에서 잠을 깬 나는
용수골을 타고 오르는 신비한 새벽 안개를 보았다.
하늘 말나리와 야생화 만발한 산길을 걸어
겁없이 운문산을 넘었다.
그날처럼 운문산을 가벼이 넘어본적은 없다.
새벽 기운이 나를 신들리게 한 모양이다.
학심이골 너머 청도땅이 꿈속의 도원처럼 가까이 보였다.
그날도 꿈같았지만
그날을 기억하는 지금도
다 꿈만 같다.
나아갈 산도
지나온 산길도 다 꿈이다.
나는 일행을 멀리 보내고
한참 꿈에 젖어있기를 주저하지않았다.
사자봉에 이르는 중허리에
로프웨이 스테이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저 케이블카가 준공되면 새롭게 만들어질
등산길을 열심히 가늠해 본다.
나이가 들게 되면,
나이가 들게되면 이라는 가정이 서글프지만
좌우지간 내 나이가 들어서도
영남 알프스에 우뚝 설 수 있는 길이란
결국
저 로프웨이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으리라
그날이 언제 일지 모르지만
그리 먼 날은 아닐거란 생각이 문득 든다.
가지산과 중봉
가지산은 영남 알프스의 어뜸산이다.
그래서인지 산행을 시작한 초기에는
가지산은 늘 열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저런 산을 올랐지만
늘 변두리처럼 느껴졌고
가지산만을
유일한 등용문처럼 여겼다.
나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손위 처남과 함께 단둘이서 일월 벽두에 가지산을 올랐다.
들머리를 어떻게 잡았는지
에둘러말하는 변명처럼 산길은 복잡했다.
초겨울의 쌀쌀함과
겨울산의 속내와 같은 따뜻함이 적절히 교배되어 나온
알쏭달쏭한 날씨.
초행의 서툼마저 두루섞인
특이한 산행이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하니
참 편안했고 누군가에 의해 떠밀리지 않는
여유를 만끽한 산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땅거미 어둑거리는
석남사 뒤를 수직으로 내려오며
비로소 이루었다는 그 뿌듯한 자신감이
저 광활한 영남 알프스의 제봉을 넘나들게한
내 자신감의 원천이된 셈이다.
가지산 꼭대기에서 맞던 그 원시의 바람의 바람을 회상한다.
폐장을 파고 드는 바람이었다
멀리 울산으로부터 직송되어온
순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거친 동해 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아랑곳 않는듯
봄을 준비하는 석남사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양가의 감정을 대립시켜
세상을 해석하고자 하는 노력은
인간의 오랜 습성이지만
이 날의 느낌만은 정말 새겨둘만한 것이었다.
세상이 보여주는 대립은
오로지 마음의 산물이다.
갑도 을도 하나의 뿌리이다.
그날 살을 파고드는 가지산 산정의 바람을 맞으며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비로소 크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구름 없는 창공에서
비로소 열쇠와 같은 희망을 보았다.
재약산 수미봉
영축지맥의 제산들
산은 쓰기 보다는 씌여져야 한다.
내가 바라 본 세상을 사진으로 설명하듯
산을 묘사하는 내 빈곤한 표현력을 넘어
내가 바라 본 모든 산들은
내 눈과 마음으로 다시 상상되어져야한다.
산이 산일진데,
내가 바라 본 산은 대체 어떤 산인가?
오늘은 세상이 내게 던지는 물음이 없다.
물음이 없는 산이 하도 담백하여
나는 겨우 망망대해에서
좌표에 맞추어 제 위치를 확인하는 배처럼
산과 산에 의지해
비로소 나를 느끼고 있다.
졸참나무 사이의 임도를 따라 봄을 걷는다.
은빛 가지마다 봄기운이 가득하다.
바람마저 한결 누그러져 걷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다만 눈녹은 자리가 진창을 이루어
등산화를 무겁게 했다.
발 아래의 걱정을 멀리하고
가슴을 펴 봄빛을 마음껏 마신다.
수미봉
사자봉
마침내 사자평.
우체부가 무시로 드나들며 편지를 던져넣던 빈 마당처럼
불현듯 산길이 텅 비어있다.
오랜 집 뒤란처럼 걱정이 사라진 풍경이었다.
바람이 풍경을 더 쓸쓸하게 했다.
집념없는 일생을 살아 온듯한
밋밋한 봉우리 하나가 앞을 가로 막는다.
무릎을 접어 참선에 든듯한 고요가 억새의 평원을 가득 채웠다.
안도와 안도를 넘어선 경탄이 가슴팍을 밀며 쏟아졌다.
한숨도 經이요
안도도 論인데
세상은 도무지 적멸했다.
사자평
바람을 이겨낸 묵직한 고요가 엄습했다.
위령을 하는듯 들판 너머로 잔설의 신불산이 아른거린다.
가슴에 켜를 이루며 바람이 쌓여갔다.
이미 마음은 뜨겁지 않다.
나는 부피로 쌓인 바람을 주체하다
힘없이 게워내는 체증 환자처럼
풍경을 토해내었다.
풍경 위로 슬픔이 설핏했다.
생의 마지막이 될 황량함과
화석같은 연민을 남기는
"파리 텍사스"의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은 이미 생장점을 지나
맹열히 자라오르는 새순처럼
봄 햇살에 한층 거칠어진 내 살갗을 뚫고
스믈 스믈 스며들었다.
불현듯 거칠것이 없는 용기가 샘솟았다.
만용이라해도 좋을 흥분이었다.
싱그러움이 한바가지 담긴 그런 혁명의 봄바람이 문득 불었다.
샘물상회
사자평 억새밭
- 후 기 -
세상은 내가 가지처럼 다가가기를 원했으나
나는 뿌리가 되어 도망친다.
내가 말하지 못한 뿌리 속 아픔이
삶을 은유한다하여도
그것은 다만 내 아픔일 뿐.
키큰 나무를 지나는 바람이여
보아라
내 견고한 견딤으로 인해
넓은 하늘이
비로소 쉬어감을.
Franz Schubert; Frühlingsglaube, D 686 / Op.20 No.2
-슈베르트 봄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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