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詩도 없고
마음도 없는 그런날
산을 향한 성가신 열망을 용기삼아
나는 또 산을 오른다.
설악 공룡
한번 들어서면 되돌아 나올수 없는 외통의 일방로로
무작정 나를 밀어넣는다.
상상할 수 없는 浮沈의 지옥이라는
이 매혹의 능선을 향해 나를 불태울 준비가 끝났다.
금강굴에서의 아침
비선대 04.40분 출발
새벽 세시에 동료들을 깨워 라면에 밥 한 주먹 우겨 넣고
산에 오를 준비를 한다.
일찍 일어나 설치는 나를 두고
몇십분의 잠을 놓친 산대장이 영 분이 풀리지않은듯 푸념을 늘어놓는다.
새벽 산길의 준비 과정은 늘 이렇다.
어디던 일찍 서두르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매사에 느긋한 이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언제나 일찍 일어나는 새다.
부지런한 새소리를 들어며
금강송 붉은 숲길을 지나 비선대로 나아간다.
목이 긴 여인이 붉은 빛을 흘리며 지나간다.
아침 산길은 이래서 좋다.
첫새벽의 햇살을 머금고 있는 천불동 계곡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빛은 해뜨고 두시간 동안의 빛이다.
이 시간의 빛은 그야말로 감미롭고 순결하며 본질적이다.
어두움으로부터 막 벗어난 가장 태고에 가까운 빛.
사물과 나 사이에 놓인 우주의 매질이 한없이 엷어져
투명의 극에 이르면
나는 마치 물속의 반짝이는 돌을 보듯
가공되지 않은 첫풍경을 접하게된다.
황홀경이다.
실로 황홀경이다.
금강굴에서
내설악의 초입인 비선대를 지나면
높은 절벽위에 새 둥지처럼 놓인 금강굴을 보게된다.
설악산 천불동은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이 한치 양보없이 격돌하여
우리나라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계곡으로
그 천불동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금강굴인것이다.
동해의 이른 아침해가
설악산을 깨운다.
흰 바위 마다에 신새벽의 어린빛들이 난반사해
동물의 뼈처럼 하얀 바위 비늘을 일제히 일어켜 세운다.
순식간에 쏟아진 빛으로 숲은 일순 분주해진다.
얼마나 역동적인 아름다움인가
매 순간의 감동이 마음을 흔들어
마침내 주체할 수없이 커져가는 파동의 나팔꽃.
수만 송이의 꽃을 한꺼번에 피워내는
합주를 듣는것 같다.
산에서의 아침은 바다에서의 아침과 사뭇 다르다.
저 먼 수평선에서
이글거리듯 끓어 오르며 요동치는 빛이 아니라
산 중의 빛은
훨씬 고요하고 정화된듯 하다.
북구의 쇼팽이라 불리는
그리그의" 아침의 인상'처럼 산중의 빛은 부드럽게 일렁이며
서서히 고조된다.
나뭇잎마다 빛의 열매들이 영걸고
엷게 말린 과일조각처럼 바위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만가지의 빛들이
따뜻한 보살핌으로 세상 만물을 감싼다.
바다는 세상의 모든 빛을 다 흡수하고
오로지 푸른 빛만을 내뱉아
바다를 푸르게 보이도록 하지만
아침의 산에서는 숨길 빛이란 없다.
고도를 높이자 공룡 능선의 비경들이 하나 하나 모습을 드러낸다.
설악동에서 마등령까지의 고도는 1000m가 넘는다.
말이 1000m이지 적어도 나에게는
실로 끔찍한 높이이다.
그래도 이 끔찍한 수직 상승의 사이 사이에
이처럼 놀라운 풍경이 놓여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내 머리 속에는
물음표가 낚시바늘처럼 떠다닌다.
과연 저 봉우리며 고개들을 정말 모조리 넘어야만 하는것일까.
대청 소청을 뒤 배경으로한 공룡 능선
마등령을 오르며
참 이상한 일이다
오늘의 산길은.
나는 아무일 없다는듯 태연히 산길을 오른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것일까?
이른 아침 산사를 찾는 수도자의 심경일까
매 걸음이 경건하고 진중하다.
걸음을 통한 고초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로
여유있게 고통을 받아들인다.
고통은 밀어낸다고 하여 줄어드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응당 내게 속한것이다.
고통을 물리치고 나니
고도를 올릴 수록 즐거움이오히려 더하다.
하지만 마등령은 여전히 멀다.
통과의례의 험한 관문처럼 느껴진다.
우측에서
나한봉-1275봉-천화대-범봉
뒤
소청-대청에서 이어지는 화채능선
마등령
좌측 황철봉-미시령 백두대간 길 .
지금은 갈 수 없는 금단의 길이다.
휴식년이다.
하늘의 경계인 서북능과 용아장성
용아장성 앞쪽이 가야동 계곡.뒤가 수렴동 계곡이다.
설악 공룡의 화려한 자태
산속 미로를 통과하듯 바위길을 이리저리 돌아 산봉우리에 이르면
다시 롤러 코스터를 탄듯 수직으로 곤두박질 치며 산을 내려가게 된다.
도대체 이런 살벌한 부침을 몇번이나 감행해야 하는지.
상행 하행의 여지가 없는 좁고 위험한 소로를
조금씩 양보하며 통과하자니
자연히 지체가 일어난다.
그 때가 쉬는 시간이다.
이런 구간이 많아서인지 걷기에는 편하다
호흡이 내내 얌전한게 그 증거이다.
아직 봄인 고개 마루에는 철쭉의 일종인 연달래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돌단풍과 큰앵초의 군락들이 눈에 띈다.
아직 싸늘하기만 한 바람들은 어디서 불어 오는지
곳곳에 남아 시든 꽃에 물을 주어 생기를 되살리듯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어준다.
참 행복한 산행이다.
산길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일찍 가져보지 못한 여유로 감동의 잔상이 길다.
에델바이스
소중한 추억이란 꽃말이 담겨있다.
바위 틈에 소담스레 피어 있는 에델바이스의 발견이야 말로
이번 산행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다.
설악 공룡
설악 공룡은 설악산의 꽃봉우리로
내설악과 외설악의 경계를 이루는 대표적 능선이다.
자체 발광의 수려한 아름다움을 차치하고라도
그 주변의 능선을 조망하는 즐거움 또한 크다.
그저 넋을 잃고 "와"하고 탄성을 내지러다보면
마치 양귀비에 중독된 시인처럼
오름의 고통도
내려감의 긴장도 다 잊고
마침내 일희 일비도 다 잊은 채 산길에 빠져들고 만다.
나한봉과 1275봉 천화대 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맨 뒤는 화채봉
붐비는 등산로
경사가 급하고 좁아 곳곳에 정체를 이룬다.
솜다리-에델바이스
호모 센티멘탈리스트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감정을 소유하므로-
감정을 가치로 정립한 사람.
설악공룡에서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과 유쾌함을
과연 어떤 가치로 정립할 수 있을까 하는것이
산을 걷는 내내 내가 가진 고민이었다.
어떡하던 이 기분을 그대로 타자에게 전하고 싶으니까.
감정을 하나의 가치로 간주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그 가치에 긍지를 느끼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감정의 전시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 산길을 걸으며
나는 너무도 풍경에 압도되어
감정의 전시물을 내놓지 못한 채 그져 끙끙대고만 있다.
풍경 그대로가 가치이다.
어떤 은유도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껏 살아 오며 이런 몰아의 풍경을 접한 바 없다.
풍경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지의 아름다움
언어를 넘어서는 풍경
혼자만의 탄식
결국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은 슬픔이란 어슬픈 결론을 내리고 만다.
암능 사이의 소로.
바람골
설악 공룡에 가면 이런 작은 봉우리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한번쯤 기를쓰고 올라 볼일이다.
비경이 비경을 부르고
그 놀라움은 놀라움을 불러 마침내 탄식을 쏟아내어
꺼이꺼이 울고 싶은 고약한 허무를 얻게 될터이니.
한식경의 걸음으로 산길을 논할수 없는것은 물론이려니와
내가 본것이 다가 아니란 사실을
산 모퉁이 채 돌아서기도 전에 느끼게 될것이기에.
그러므로 설악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발견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발견에 대한 집요한 열망이
더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하는것이다.
산에서 전해지는 이 전대미문의 울림을 맞이하는 긴장감이야 말로
아름다움인것이다.
바람골에서 보는 울산 바위
(우측 상단)
1275봉
봉우리 아래에서 보면 멀리서 볼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 뾰족하고 날카롭던 모습은 어디가고
그저 두루뭉술한 아저씨의 두상처럼 보인다.
그 정수리를 향해
몇미터 올라가다 되 내려오고 만다.
오르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위험을 감수할 나이가 아니었다.
금지된 구역을 오르지 않은것이 내 산행 규칙이니까.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산과 구름의 아믈다움
아름다운것 중에 복잡한것은 없다
하늘은 쉽고 땅은 간단하다.
세상의 울림은 점 하나에서도 나온다.
산 봉우리마다 그 울림이 가득하다.
대청과 소청 .
중청은 소청에 가려 보이지 않음.
내 삶은 늘 소심함과 두려움에 마비되고
선자령의 바람처럼 늘 춥고 고독한 것이었다.
내 삶에 산에 치중하는 시간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삶의 언저리는 늘 어둡고 차가운 그림자였다.
병마가 나에게 산을 향한 용기를 주고
두려움의 그늘을 밀어냈다.
지난 여름 봉정암에 서서 공룡능선의 육중한 자태를 바라보며
나는 공룡으로 나아갈 꿈을 키웠다.
가능도 불가능도 짐작하지 않은 채
나는 내 낡은 배낭에 공룡에 대한 희망이라는것을 채워넣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달아 올라 뜨거운 열망으로 변했고
나는 오늘 그 꿈을 기어이 이루어냈다.
이 나이에 꿈을 가지는것도 신기한 일이려니와
그것을 몸소 이루어 낸것도 대견한 일이다.
산의 모습에는
어떻한 음모도 미쳐날뛰는 정치의 깃발도 없다.
오직 나와 나를 넘어설 용기의 기회만이
주어진다.
지금 나는 공룡의 능선에 우뚝 서서
지난 여름 내가 서 있었던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영혼에 깊히 박혔던 그 열망의 가시들이
하나씩 빠져 나오며
나에게 원색의 성취감을 가져다 준다.
오늘은 하늘도 맑아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기 좋은 날이다.
비바람을 몸으로 맞던 대청봉의 추억도
용아장성에 수줍게 선 봉정암 적멸보궁의 추억도
다 오늘을 향해 이어진 연기에 불과했다.
푸른 능선 사이로 오늘도 어김없이 버려진 흰 하늘이 내려와 앉고
그 곁에 잠시 숨을 고르는 나를 보게된다.
자천으로 핀 큰앵초
신선봉 가는 길
공룡 능선
불멸과 소멸
신선봉 가는길에 산길을 벗어나
큰 바위 꼭대기로 올라가 보았다.
공룡의 등줄을 이룬 온갖 비늘들이 성난듯 하늘을 향해 곤두서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유한하기에
인간은 불멸을 꿈꾸게 된다.
무한한 세상 저 너머를 꿈꾸는 인간은
일찌기 그 한계를 자각하고
예술이라는 불멸의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보라
모든 자연은 예술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닌다.
나는 오늘 겨우 그것 하나 확인했을 따름이다.
한 시대의 아름다움은 그 시대의 유행과 같은것
그 인위적 한계에 종말을 고한다.
진실로
진실로
모든 자연은 아름다움을 초월하는것이다.
대청 중청 소청 삼형제
범봉과 울산 바위
아름다움
우리는 삶을 통해 누구나 아름다움을 경험한다.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美에대한 논란은 대단히 주관적인것이기에
아름다움이란 살아있는자의 경험론에 가깝다고도 불 수있다.
어떤이는 변화하고 생성하는 모든것이 아름답다고 하였고
어떤이는 인간과 무관하게
변화하지않는 아름다움의 본질은 없다라고도 하였다.
어떤이는
사물이 아니라 느낌의 순간이 아름다운것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이는
자연은 아름다움을 초월한다고도 하였다.
이 모든 아름다움에대한 저 마다의 정의가
전람회의 그림처럼
제 각각의 의미를 발하는곳 이 산이요
특히 설악산하고도 공룡 능선이 아닐까.
천불동 계곡
그리고 또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린시절의
소박한 풍경하나를 떠 올리거나
삶속에 숨어있는 흔한 풍경속의 질박한 한 순간 예를 들면
어느 골목에서 들었던 쇼팽의 피아노곡
냄새,빛,애인들이 주고 받는 속삭임...
이 모든 대상이 아름다움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설악 공룡에서 느끼는 감동은
세상에서 일찌기 본 바 없는 아름다움이므로
아름다움의 대상이 주는 일종의 충격같은것이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이런 종류의 충격이야 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모든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 아름다움.
나는 오늘 그 경계의 상흔을 가슴 깊이 새기고 간다.
다시 비선대 入口
15시 21분
- 에필로그 -
우리나라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천불동 계곡을
종종걸음으로 내려왔다.
무릎관절에 해가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 걸음거리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지난 늦가을 비를 맞으며 내려왔던 천불동 계곡.
나는 그 날 다시는 이 계곡을 찾아오지 않겠다는 정성으로 계곡을 즐겼다.
그러므로 오늘의 종종걸음은 그날의 자신감에서 유래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오늘 공룡능선 길은 어땠을까
오늘의 산행이 다시는 공룡능선을 찾지 않아도 될만큼
만족스러운 것일까.
돌이켜 생각하니
설악공룡은 내가 한번에 넘어 설 공간이 아니었다.
이 목에 남은 아쉬움이
나를 다시 공룡의 거친 암릉에 서게 할 갈증이 되었으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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